사회의 표본이 되는 공통의 배경. 그리스 정교 사회의 표본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그리스 정교 사회의 표본
이 사회의 기원을 조사해 보면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의 표본이 늘지 않는다. 이 사회는 분명히 서유럽 사회와 함께 헬라스 사회에서 태어난 쌍둥이이며, 단지 그 지리적 이동 방향이 서북쪽이 아니고 동북쪽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이 사회의 요람 또는 발상지는 비잔틴령의 아나톨리아이며, 경쟁 상대인 이슬람 사회가 팽창함으로 인해 몇 세기 동안이나 거기에 갇혀 있었지만 결 국에는 북쪽과 동쪽 방향으로 뻗어 나가 러시아 및 시베리아 전역에 걸쳐 보 져나갔고, 이슬람 사회의 바깥쪽을 둘러싸고 동아시아 사회를 침범하게 되었다.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와 그리스 정교 사회가 두 개의 다른 사회로 나누어진 것은 공통의 번데기였던 가톨릭교회가 로마가톨릭과 그리스 정교 두 개의 개체로 분열했기 때문이다. 이 분열은 3세기 이상에 걸친 기간 동안에 행해졌는데, 8세기의 성상 파 괴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1054년의 신학상의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격렬 한 다툼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이 기간 동안에 급속도로 분열된 두 사회의 교회는 뚜렷이 대립하는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서방의 가톨릭교회는 중세 교황제의 독립적인 권위 밑에서 중앙집권적으로 통일되었고, 그리스 정교회는 비잔틴 국가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란 및 아람 사회와 시리아 사회의 배경
다음에 조사해야 할 현존 사회는 이슬람 사회인데, 그 배경을 살펴보면, 서유럽 사회와 그리스 사회처럼 공통의 배경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 만, 분명히 세계 국가와 세계 교회와 민족 이동이라는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 이슬람 사회의 세계 국가는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인 칼리프국이다. 세계 교회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이슬람교자체이다. 칼리프국의 몰락과 함께 영토를 침략하여 민족 이동을 해 온 것은 유라시아 스텝 지대의 투르크 및 몽골 유목민과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 유목민,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 유목민들이었다. 이 민족 이동으로 인해 거의 975년으로부터 1275년까지 의 3세기 동안에 걸친 공백 기간이 생기는데, 그 뒤의 연대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이슬람 사회가 시작한 연대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간단명료하지만, 이제부터 앞으로 더 나아가면 복잡한 현상이 나타난다. 첫째는 이슬람 사회의 선행자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가 하나를 낳은 것이 아니라 쌍둥이를 낳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역시 쌍둥이를 낳은 헬라스 사회와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이 두 쌍의 쌍둥이의 행동은 몹시 다르다. 서유럽 사회와 그리스 정교 사회의 경우, 이 쌍둥이는 1천 년 동안이나 공존해 왔지만, 지금 우리가 규명하려고 하는 '어버이' 사회가 낳은 쌍둥이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삼켜 버렸기 때 문이다. 이 쌍둥이 이슬람 사회를 이란 사회와 아랍 사회라고 부르기로 한다. 어버이가 확인되지 않은 '자식' 사회가 분화된 이유는 헬라스 사회의 '자식' 사회가 분열한 것처럼 종교상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스도교회가 로마 가톨릭교회와 그리스 정교의 두 개로 나누진 것처럼 이슬람교도 수니파와 시아파의 두 파로 분열됐는데, 이 이슬람교의 종교 분열은 모든 단계에 있어 이란 이슬람 사회와 아랍 이슬람 사회의 구분과는 달랐다. 그러나 16세기 제1•4 반기에 시아파 이슬람교가 페르시아에 널리 퍼지게 되자 결국 종파 분열이 이란 이슬람 사회를 분열시키고 말았다. 그 결과 시아파는 이란 이슬람 사회 주축의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수니파는 이란 세계의 양끝에 있는 남과 서의 아랍 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두 개의 이슬람 사회와 두 개의 그리스도교 사회를 비교해 볼 때, 페르시 아-투르크 지대 또는 이란 지대라고 부르는 지역에 나타난 이슬람 사회는 우리 서유럽 사회와 어느 정도 비슷한 데가 있으며, 아랍 지대라고 부르는 지역에 나타난 또 하나의 이슬람 사회는 정교 그리스 사회와 어느 정도 비슷한 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3세기에 카이로에서 맘루크왕조*6가 불러낸 바그다드 칼리프 국의 망령 즉, 카이로의 압바스왕조 칼리프국)은 8세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사우리아 왕조의 레오에게 불려나온 망령을 연상시킨 다. 맘루크가 건설한 제국은 레오처럼 영속적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서유 럽의 샤를마뉴 제국처럼, 나타났다가 금방 모습을 감추어 버린, 광대하고 종 잡을 수 없고 목숨이 짧았던 이웃 이란 지대의 티무르 제국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아랍 지대에서 문화의 매개자가 되었던 고전어는, 바그다드 압바 스 왕조 칼리프국의 문화적 언어였던 아라비아 어 자체였지만, 이란 지대에 서의 새로운 문화는 페르시아어 -그것은 마치 라틴 어가 그리스에 접목되어 여기에서 양분을 빨아먹고 성장한 것과 같은 언어였다를 새로운 매개자로 했다. 마지막으로, 16세기에 이란 지대의 이슬람 사회가 아랍 지대의 이슬람 사 회를 정복하고 병합한 것은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가 그리스 정교 사회를 침략한 것과 꼭 같다.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의 침략은 1204년에 제4차 십 자군이 창끝을 콘스탄티노플로 돌려서 공격했을 때 최고조에 달했으며, 한 때는 그리스정교 사회가 그 자매 사회 때문에 영원히 정복당하여 합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것이야말로 바로 약 3세기 뒤인 1517 년에 아랍 사회를 엄습한 운명이었다. 이 해에 오스만튀르크의 제9대 왕인 셀림 1세 (투르크 대왕)에 의해 루크 정권이 타도되어 카이로의 압바스 왕조 칼리프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마치 로마 제국이 헬라스 사회의 최종 단계를 표시하는 징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바그다드의 압바스왕조 칼리프국이 그 최후 단계를 표시하는 징표가 된 이 미확인 사회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를 취급해야 한다.
그 사회의 발견, 세계 국가를 재건할 길
압바스 왕조 칼리프국에서 역사를 한 걸음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헬 라스 사회의 최후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둘째 번 단계로 판명되었던 저 동란 기에 해당하는 현상을 찾아낼 수 있을까?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 칼리프국의 배후에 는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왕조 칼리프국이 있었고, 또 그 배후에는 1천 년에 걸친 헬라스 사회의 침입이 있었다. 이것은 기원전 4세기 후반에 마케도 니아의 알렉산더가 원정을 개시함으로써 시작되어, 그 뒤 그리스계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 왕국, 폼페이우스의 출정과 로마의 정복에 이어 기원후 7 세기 초에 이슬람교의 군대에 의해 행해진 오리엔트 복수전을 마지막으로 겨우 그 침략의 종지부가 찍혀졌다. 초기 이슬람교 아랍인들의 노도와 같은 정복은, 역사의 리듬 속에서 역시 노도와 같은 기세로 행해진 알렉산더의 정 부에 대하여 똑같은 가락으로 응수하였던 듯싶다. 알렉산더의 경우와 마찬 가지로 그들은 겨우 5~6년 동안에 세계의 면모를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원상을 형태도 남기지 않고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니라, 마케도니아가 아케메네스 제국 (즉, 키루스와 그 후계자들이 세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분리하여 헬레니즘의 씨앗을 뿌릴 바탕만을 만들어 놓았듯이, 아라비아 인의 정복은 우마이야 왕조나 그 뒤를 이어받은 압바스 왕조가 아케메네스 제국과 같은 세계 국가를 다시 재건할 길을 열어 놓았을 뿐이다. 이 두 제국의 지도를 포개어 놓고 보면 윤곽이 거의 맞먹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마케도니아와 아랍족의 정복상의 이런 일치는 단순히 지형적인 일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통치 방법이나 좀 더 내면적인 사회생활, 그리고 정신생활의 여러 가지 사회현상에 이르기까지 파급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압바스 왕조 칼리프국의 역사적 역할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재편성과 재개, 외부 세력의 충격에 의해 봉쇄당한 정치 조직의 재편성, 그리고 외래 인의 침입 때문에 중단된 사회생활의 국면을 다시 열어 놓은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압바스 왕조 칼리프국은 확인 사회의 마지막 국면이었던 세계 국가가 다시 열린 것으로 보아야겠고, 따라서 이 미확인 사회의 탐구는 헬라스 사회의 침입이 시작된 1000년 전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제 우리는 압바스 왕조 칼리프국 이전의 단계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사 회현상, 즉 헬라스 사회의 역사에 있어서 로마 제국을 수립하기 직전에 있었던 동란기와 비슷한 것을 아케메네스 제국 직전의 시대에서 찾아내어 조사해야겠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성립과 로마 제국의 설립을 볼 때, 일반적으로 유사점 이 많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세부적인 면에서 다른 점은, 헬라스 사회의 세계 국가는 그전에 있었던 동란기에 주된 파괴자 역할을 한 국가 그 자체로부터 건설되어 발달해 온 데 비해, 아케메네스 제국은 로마가 연속적으로 파괴적 역할과 건설적 역할을 했지만 결국에는 각각 다른 국가가 그 역할 을 했다는 점이다. 파괴적 역할을 한 것은 아시리아였다. 그런데 아시리아는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그때까지 가진 고난을 겪어온 사회를 세계 국가로 형성하여 그 사업을 완성시킬 수 있는 단계에 있었는데, 지나친 군국주의 때문에 자멸하고 말았다.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기 직전에 (기원전 610년) 주역이 극적으로 쓰러지고 말았으니 그 역할을 이어받은 것은 뜻밖에도 그때까지 단역을 맡고 있던 자였다. 즉 아케메네스 왕조가 아시리아 인이 뿌린 씨앗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배역이 바뀌었다고 해서 연극 줄거리의 성질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동란기가 확인되었으니 우리는 그럭저럭 우리가 찾고 있던 사회를 발견하게 되었다. 소극적으로는, 그것은 아시리아 인이 속해 있던 사회와 같은 사회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시리아 인은, 이 길고 긴 뒤얽힌 역사의 마지막 단계에 모습을 나타낸 마케도니아 인과 마찬가지로 밖에 서 들어왔다가 마침내 밖으로 사라진 침입자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아케메네스 제국에 의해 통일되었을 때, 이미 확인 선행사회에서 아카드 어와 설형 문자가 서서히 아람어와 아람알파벳으로 대치되었는데, 이 현상 속에서 아시리아에 의해 밀려나간 문화 요소가 평화적으로 제거당하는 과정을 찾아볼 수 있다. 아시리아 인들 자신은 말기에, 점토판에 찍거나 돌에 새겨 쓰던 전통적인 설형 문자 이외에, 양피지에 쓰기 위해 아람 알파벳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아람 알파벳을 사용한 이상 아람 어도 사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아시리아 제국과 그 뒤에 출현하여 단명한 신바빌로니아 제국(즉, 네부카드네자르의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아람 알파벳과 아람어는 끊임없이 세력을 넓혀 진출했고, 기원전 1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아카드 어와 설형 문자는 그 고국인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