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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이집트 사회 역사의 전형

by 공부하는 샤샤 2026. 6. 8.

피라미드, 이집트 사회 역사의 전형. 이집트 사회의 출현과 피라미드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한다.

피라미드, 이집트 사회 역사의 전형

 

5000년 이상, 앞으로 몇 십만 년은 더 존속할 피라미드

지극히 주목할 만한 이 이집트 사회는 기원전 4000년대 중에 나일강 하류 유역에 출현하여 기원후 5세기에 절멸했다. 즉, 이 사회는 서유럽 사회가 오늘날까지 존속해 온 기간의 적어도 3배나 되는 기간 동안 살아온 셈이다. 이 사회에는 '어버이'도 없고 '자식'도 없다. 현존하는 어느 사회도 이것을 조상이라고 주장할 사회가 없다. 무엇보다도 한층 더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이 사회가 돌 속에서 구하여 찾아낸 불멸성이다. 이미 5000년 이상이나 되는 기간 동안 스스로는 생명이 없지만 자신의 창조자의 존재를 말없이 계속 증언하고 있는 피라미드는 아마 앞으로 몇 십만 년은 더 존속할 것이다. 이 피라미드가 인간이 완전히 절멸해 버린 뒤에도 남아서, 이미 피라미드가 전하는 사연을 해독할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 여전히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는 있었다'라고 계속 증언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전혀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 거대한 피라미드 분묘가 이집트 사회 역사의 전형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한 가지 점에 의해서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 사회가 약 4천 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했는데 그 기간의 전반은, 이집트 사회가 살아 있는 유기체라기보다도 오히려 죽긴 했지만 아직 매장당하지 않은 유기체의 상태에 있었다. 이집트 사회 역사의 절반 이상이 거대한 마지막 장인 것이다. 그 역사를 더듬어 가면 전체 길이의 4분의 1 이상의 기간이 성장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처음에, 매우 감당하기 어려운 자연환경을 제어 전에 나일 강의 하류 유역과 삼각주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울창한 밀림·늪지대의 개척과 배수와 경작한 형식으로 나타났고, 이어서 선왕조 시대의 끝무렵엔 예외적으로 빠르게 이집트 세계를 정치적으로 통일하여 한층 더 성장의 속도를 가했고, 제4왕조 시대에는 놀랄 만큼 물질 사업이 번창하여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 왕조는 이집트 사회가 이룩한 독특한 위업, 즉 늪지대의 간척 사업으로부터 피라미드 건설력에 이르기까지의 거대한 토목 사업에 인간 노동을 통합하는 능력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그리고 또 행정과 예술면에 있어서도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지혜는 고뇌로부터 탄생한다(「아가멤논」의 한 구절)'는 종교의 영역에 있어서까지도, 이른바 ‘피라미드 문서'는, 이집트 사회가 쇠퇴기로 접어든 뒤에 성숙기의 경지에 도달한 두 개의 종교 운동, 즉 태양신 숭배와 오시리스 숭배 역시 이미 탄생하여 충돌하였고, 서로 간에 영향을 끼치는 최초의 단계를 거치고 있었다는 증거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제5왕조로부터 제6왕조로 옮아가는 시기, 즉 기원전 2424년경에는 전성기가 지나 쇠퇴기가 시작되는데, 이 시기부터 예의 쇠퇴의 징조가, 지금까지 다른 사회의 역사에서 보아온 대로의 순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이집트 사회의 연합 왕족은 서로 싸움을 되풀이하여 몇 개의 작은 나라로 분열하는데, 이것이야말로 틀림없는 동란기의 징후인 것이다. 이 이집트 사회의 동란기가 지나고 나서 세계 국가가 나타난다. 이 세계 국가는 기원전 2070년경 테베의 지방 왕조에 의해 수립되었고, 제12왕조(기원전 2000~1788년 경)에 의해 강화되었던 것이다. 제12왕조가 몰락한 뒤 이 세계 국가는 쇠퇴되었고, 그 뒤 계속되는 공백 기간 동안에 힉소스족의 침입으로 민족 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여기서 이 사회는 끝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령 우리가 종전대로의 방식에 따라 기원전 5세기경부터 출발하여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조사해 보면, 아마도 우리는 여기에 멈추어 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발자취가 마지막으로 없어진 기원 5세기부터 거꾸로 이집트 사회의 역사를 25세기 동안 거슬러 올라가면, 세계 국가가 몰락한 뒤에 나타나는 민족 이동과 마주치게 된다.

 

기원전 16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우리는 이집트 사회의 기원을 찾아냈는데, 그 기원 저쪽에는 한 시대 전의 사회의 종말이 엿보인다. 이 사회를 '나일' 사회라고 이름을 붙이자”라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시점에서 또다시 시대를 내려오며 조사해 보면 새로운 사회라고도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현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를 침입한 변방 민족들의 '후계 왕조'는 타도되고 힉소스 족은 나라 밖으로 추방당한다. 그리고 테베에 수도를 둔 세계 국가가 의식적으로 계획적으로 부흥되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세계 국가의 부흥이라는 것이 기원전 16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의 기간 동안 이집트 사회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이크나톤이 일으켜 실패로 끝난 혁명을 제외하고). 그 후 2000년의 기간 전체를 통하여 이집트 사회의 세계 국가는 여러 번 쓰러졌다 재건되고, 쓰러졌다 재건되며 존속했다. 새로운 사회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집트 사회의 종교사를 살펴보면 역시 공백 기간 뒤에는, 그 이전에 쇠퇴기에 접어들었던 지배적 소수자로부터 이어받은 종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노력도 하지 않고 그렇게 된 것은 아니며, 이집트 사회의 내적 무산자계급 (프롤레타리아)이 쇠퇴기에 오시리스 종교로부터 창조해 낸 세계 교회와 타협함으로써 비로소 그 지위를 확보했던 것이다. 오시리스 종교는 이집트 사회의 정치사가 형성되었던 상부 이집트 (카이로 이남수단에 이르는 부분)가 아닌 델타지대로부터 들어온 종교였다. 이집트 사회의 종교사를 꿰뚫는 중요한 날줄은 이 지상과 지하의 자연을 지배하는 신교대로 지상에 모습을 나타냈다가는 지하로 모습을 감추는 식물의 정령과 하늘을 지배하는 태양신 사이에 벌어지는 세력 다툼이었는데, 이 신학 상의 싸움은 2개의 숭배 사상이 발생한 2개의 사회 부문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사회적 싸움과 연결되어 있었고, 또한 사실상 하늘을 지배하는 태양신의 신학적 표현이기도 했다. 태양신 레이 숭배는 헬리오폴리스(카이로에 가까운 동북방에 있는 도시)의 신관 계급의 통제를 받았고, 레이는 파라오(고대 이집트 왕)를 모델로 구상된 것이었고, 이것과는 반대로 오시리스 종교는 대중 종교였다. 이 두 개 종교의 본디 형태상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 종교가 신자에게 제공하는 사후 생활에 대한 견해의 차이였다. 오시리스는 지하에 있는 그늘의 세계에서 수많은 사자를 지배한다. 레이는 보수를 받고 그의 신자를 죽음으로부터 소생시켜 승천하게 한다. 그러나 이렇게 신격화되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하는 자에게만 예약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끊임없이 인상되어 결국 태양신이 주는 영생은 사실상 파라오가 필요한 경비를 대주는 그의 신하만의 영생을 위한 독점물이 되고 말았다. 대피라미드는 터무니없이 거대한 건조물을 세움으로써 개인적인 영생을 얻으려는 노력의 기념비였던 것이다. 이러는 동안에 오시리스 종교는 차차 지반을 굳건히 다져나갔다. 이 종교가 제공하는 영생은 레이가 지배하는 하늘에서 사는 일에 비하면 빈약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인에게 영원한 행복을 얻어주기 위해 격심한 압제를 받아가며 복종해야 하는 민중들이 이 세상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집트 사회의 세계 국가, 무산자계급

이집트 사회는 지배적 소수자와 내적 무산자계급(프롤레타리아)의 양쪽으로 분열해 가고 있었다. 이런 위기에 직면한 헬리오폴리스의 신관들은 오시리스를 같은 편에 끌어들여 해를 입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거래에 있어서 오시리스는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는 데 성공했다. 파라오의 태양신 숭배 속으로 끼어듦과 동시에 이제 오시리스는 태양신이 제공하는 신격화와 함께 민중의 것이 되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종교 합체의 기념비가 예의 이른바 「사자의 서」이며, 이 책은 이집트 사회의 '마지막 장' 2000년 동안에 걸쳐 그 종교생활을 지배한, '서민을 영생으로 이끄는 안내서'였다. 레이는 피라미드보다도 올바른 행동을 더욱 요구한다는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오시리스는 죽은 자에게 지상에서 보낸 생활에 따라 운명을 적절히 할당해 주는 저승의 심판관으로서 모습을 나타냈다. 여기에서, 이집트 사회의 세계 국가 밑에 내적 무산자계급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의해 창조된 세계 교회의 윤곽을 찾아볼 수가 있다. 만일 이집트 사회의 세계 국가가 부흥되지 않았더라면 이 오시리스 교회의 장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새로운 사회의 번데기가 되었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교회가 이방인을 사로잡았듯이 오시리스 교회가 힉소스족을 사로잡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힉소스족에 대한 증오 때문에 오시리스 교회는 지배적 소수자의 죽은 종교와 부자연스러운 합체를 이루게 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오시리스 종교는 비뚤어졌고 타락했다. 영생이 다시 한번 상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기원전 16세기의 '부흥'은 단순히 세계 국가의 부흥에 그치지는 않았다. 그것은 오시리스 교회의 살아 있는 조직과 빈사 상태의 이집트 사회의 죽은 조직을 섞어서 하나의 사회적 콘크리이트덩어리, 완전히 풍화되는데 200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던 것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부흥된 이집트 사회가 생명이 없는 것이었다는 가장 큰 증거는 그것을 죽음으로부터 소생시키려던 유일한 시도가 완전히 실패한 일이다. 그때 하나의 인간 파라오 이크나톤이, 먼 옛날 수세기에 걸친 동란기 중 내적 무산자계급(프롤레타리아)들이 되풀이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종교적 창조를 한마디의 명령에 의해 단숨에 해치우려고 했던 것이다. 참으로 천재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이크나톤은 새로운 신과 인간, 그리고 생명과 자연의 관념을 창조했고 그것을 새로운 예술과 시로 표현했다. 그러나 죽은 사회를 이와 같이 하여 소생시킬 수는 없다. 그의 실패는, 기원전 16세기 이후 이집트 사회의 역사상 나타난 1천 년 이상 동안의 사회적 여러 현상을, 새로운 사회의 요람으로부터 묘지까지의 역사가 아니고 그저 길고 긴 마지막 종장으로 보아 무방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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