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교섭, 타격의 자극. 사회에 작용을 미치는 인간적 환경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사회에 작용을 미치는 인간적 환경, 타격의 자극
우리는 먼저 어느 사회에 작용을 미치는 인간적 환경이 지리적으로 그 사회 밖에서 자 극을 받는 경우와 지리적으로 그 사회 내부에 혼합되어 자극을 주는 인간환경의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영역의 영향은, 각기 다른 지역에 있는 두 사회 또는 국가의 한쪽 이 다른 쪽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포함된다. 그와 같은 사회적 교섭에 있어 받아들이는 측에서는 단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인간 환경은 '외적' 내지는 '이국적'인 것이다. 두 번째 영역에서의 영향은, 가장 넓은 뜻으로 '계급'이라는 말을 사용하 여, 함께 동일한 지역에 사는 두 사회 계급의 한쪽이 다른 쪽에 작용하는 경우를 뜻한다. 이 경우 관계는 '내적' 내지는 '국내적'이라고 한다. 이 내적인 인간 환경은 나중에 고찰하기로 하고 처음에 외적 세력의 영향을 다시 세분하여 그것이 돌연한 타격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경우와 계속적 압박의 형태를 취해 일어나는 경우로 나누기로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연구할 문제는 외적인 타격, 외적인 압박, 내적인 제재의 세 가지가 된다. 갑작스러운 타격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도전이 크면 클수록 자극도 크다'라는 우리의 명제가 여기서도 통용될까? 우선 최초로 검토할 경우로서 쉽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이웃과 끊임없는 싸움으로 인해 자극된 군사세력이 그 뒤 전에 한 번도 맞싸워 본 경험이 없는 강력한 적에게 별안간 타도 당한 경우이다. 제국 건설 사업에 착수한 사람들이 이처럼 도중에 극적으로 타도당했을 경우에는 보통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들은 보통 시스라처럼 쓰러진 곳에 그대로 누워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 신화의 거인 안타이오스처럼 힘을 배가하여 어머니인 대지로부터 재차 일어날까? 역사상 유명한 예는 후자 쪽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알리아의 패배가 로마의 운명에 미친 영향 은 어떠했는가. 이 파국이 로마를 덮친 것은 로마가 에트루리아의 베이이와의 장 기에 걸친 결투에 승리를 얻어 겨우 라티움 지방의 패권을 잡은 지 불과 5년 후의 일이었다. 등뒤에서 쳐들어 온 이방인에 의해 로마 군이 알리아 강 전 투에서 타도되어 로마 자체가 점령당한 일로 인해, 로마가 이겨서 얻은 권력과 위신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로마는 갈리아 인에게서 입은 재해로부터 급속히 재기하여 그로부터 반세기도 되기 전에 이탈리아의 인접 제국과 다시 장기에 걸친, 아주 어려운 싸움을 벌인 끝에 결국은 승리를 얻었고 그 권력을 이탈리아 전국토로 떨친 것이다. 또 티무르 렌크가 앙고라의 싸움에서 바에지드 일데림을 생포하였을 때, 그것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운명에 준 영향은 어떠했는가?
궤멸적인 패배를 당한 사회 집단
이 티무르가 대군을 이끌고 오스만을 습격했을 때 오스만인은 마침 발칸 반도의 그리스정교 사회 본체의 정복을 완료하려던 참이었다. 이 중요한 순간에 그들은 해협의 아시아 쪽에서 전격적으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타도된 것인데, 이로 인해 완성 직전까지 이르렀던 그들의 제국이 전면적으로 붕괴되는 것으로 생각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반세기 후에는 정복자 모하메드가 콘스탄티노플을 손에 넣어 바예지드의 사업을 완성할 수가 있었다. 로마와의 경쟁에서 진 나라들의 역사에서도 보면, 궤멸적인 패배를 당한 사회 집단이 어떻게 그 패배를 분기시켜 전보다도 한층 더 중대한 결의 하에 활동을 재개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한층 완강한 저항 뒤에 다시 패배하면 목표는 좌절된다. 카르타고의 하밀카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의 패배로 자극을 받아 에스파냐 정복에 나서 시칠리아에서 잃은 것보다 훨씬 많은 땅을 카르타 고를 위해 빼앗았다.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1)에서 한니발의 패배 뒤에도 카르타고 인들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50년 동안 두 차례나 세계를 놀라게 하는 일을 해치웠다. 첫 번째는 전쟁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상업적 번영을 빠른 시일 내에 회복한 일이고, 두 번째는 한니발 사후에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남자는 물론 여자나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최후의 싸움에 참가하여 싸우다 죽어간 그 장렬함이었다. 또 그때까지 다소 변변찮은 국왕이었던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는 그 의 나라를 아들인 페르세우스 (계도 아)가 단독으로 로마에게 도전하여 완강한 저항 끝에 피드나 (지방에 있었던 고대로서 동북부의 마케도니아)에서 최종적으로 패전하기 전에 로마 군을 거의 패배에 이르게 했을 정도로 강대한 나라로 바꾸어 놓는 일에 착수한 것 은 키노스케팔라이에서 로마군에게 패배를 당한 뒤였다. 결말은 다르나 같은 종류의 예로서, 오스트리아가 프랑스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5회에 걸쳐 참전한 일을 들 수 있다. 처음 3회에 오스트리 아는 패배를 맛보았을 뿐 아니라 완전히 면목을 잃었다. 그러나 아우스테를 리츠에서 패한 뒤에 오스트리아는 허리띠를 고쳐 맸다. 아우스테를리츠가 오스트리아에게 키노스케팔라이였다면 바그람은 피드나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보다는 다행스럽게도 오스트리아는 1813년에 다시 한번 참전하여 이번에는 승리를 차지할 수가 있었다. 그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몇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보여준 프로이센의 행동이었다. 예나의 대패에 이어 곧 항복으로 끝난 뒤 14년 간 프로이센은 무익함과 동시에 굴욕적인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그 장렬한 아일라우 전투에서 겨울 전투를 결행하였고, 지트에서 강제로 체결된 조약은 너무 가혹해 예나의 충격이 최초로 준 것보다 한층 강한 자극을 받았을 뿐이었다. 이 자극에 의해 각성된 프로이센의 활력은 비상한 것이었다. 그 힘은 프로이센을 독일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술을 담기 위해 택한 그릇으로 변화시킨 것인 데 그것은 스타인•하르덴베르크 •홈볼트를 거쳐 비스마르크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순환은 우리 시대에도 이제 새삼스레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괴로운 경험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형태로 반복되었다. 1914~18년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뒤 그 패전의 아픔을 씹고 있을 때 1923~24년 프랑스 군이 독일의 루우르 지방을 점령하여, 결 국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이것이 독일의 아픔을 한층 악화시켜 악마적인 나치스 복수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타격의 자극적 결과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예는 기원전 480~479년에 시리아 사회의 세계 국가인 페르시아 제국이 대정복을 시작하여 소아시 아 연안의 많은 그리스 국가들을 공격하기에 이르자, 헬라스 전체, 특히 아 테네가 반격에 나선 것이다. 아테네의 뛰어난 반격은 아테네가 맛본 고통의 정도에 정비례했다. 보이오티아의 비옥한 경지는 그 소유자의 그리스에 대한 배신으로 난을 면하였고 라케다이몬의 비옥한 농경지는 용감한 아테네 함대에 의해 수호되었으나 아티카의 빈약한 땅은 두 번이나 계속 수확기에 조직적으로 수난을 당했다.
아티카를 떠나 바다를 건넌 피난민
그리고 아테네 자체가 점령되어 신전들이 파괴되었다. 아티카의 주민 전부가 아티카를 떠나 피난민으로 바다를 건너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아테네 함대가 살라미스 해전 (기원전 480년)을 치러 승리를 얻은 것 은 이와 같은 정세에서였다. 아테네 인 마음속에 이 같은 불굴의 정신이 싹트게 한 타격이 그 찬란함 과 현저함과 변화무쌍한 점에서 인류 사상 비할 바 없는 업적의 전주곡이 된 것은 결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테네인에게 있어, 부활시켜야 할 조국의 옛 모습 중 가장 내면적인 상징이었던 신전 재건을 위해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 인은 1918년 이후의 프랑스 인보다 훨씬 뛰어난 생기를 나타냈다. 프랑스인은 산산이 파괴된 프랑스 랭스 대사원을 되찾기 위해 부서진 돌, 깨어진 조각 상을 일일이 충실하게 원상태로 복원했다. 아테네 인은 헤카톰 페돈이 완전히 타버려 토대만 남은 것을 보자 그 토대는 그대로 놔두고 새로운 장소에 파르테논 신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타격의 자극에 대한 가장 명백한 예증은 군사적 재난으로부터 재기하는 동안에 발견되는 것이지만, 그 이외의 영역에도 예를 들고자 한다면 없는 것 은 아니다. 여기서는(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종교 영역에 있어서 더없이 중요한 예를 하나만 들기로 하자. 결국 헬라스 세계 전체를 그리스도교에 안 겨주게 된 사도들의 이 역동적인 행적이 떠오른 것은 그들의 스승인 그리스도가 기적적으로 부활되자마자 재차 홀연히 모습을 감기 때문에 사도들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바로 그 순간이다. 이 두 번째의 상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죽음보다도 더 괴롭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타격이 심했던 일이 오히려 그들 영혼 속에, 그에 비례하는 강한 심리 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 일이 (사도행전) 속에는 신화적으로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의 출현과 모순절날의 불꽃 혀의 강림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사도들 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단순히 유대 민중에게뿐만 아니라, 산헤드린에 대해서도 당당히 십자가에 못 박혀 사라진 예수의 신성을 전도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3세기도 지나지 않아 결국은 로마 정부까지 사도들이 가장 의기소침하고 있을 때 창조된 그 교회에 항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