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사회가 직면한 문제와 성장. 서유럽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서유럽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대하는 방법
서유럽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어떻게 해서 도시 국가제를 채용하지 않고 농업을 주로 하는 귀족 본위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면서 공업위주의 민주적 생활양식으로 이행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 도전에 응한 것은 스위스와 네덜란드, 영국인데 결국 영국이 해결안을 찾아 주었다. 이 3국은 모두 유럽 전체의 생활과는 다른 고립적 방침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 방침은 어느 정도 지리적 환경에 기인한 것이다. 즉 스위스는 산맥에 의하여, 네덜란드는 제방에 의하여, 영국은 영국 해협에 의하여 보호되어 있었다. 스위스는 중세 말기의 도시 국가 세계의 위기를 연방 조직을 수립함으로써 무사히 극복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합스브루크가, 다음에는 부르고뉴가의 세력에 저항하여 독립을 유지했다.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와 싸워 독립하여 7주 연합이라는 연방을 만들었고, 영국은 백년전쟁에 결국 실패하여 대륙의 속국을 정복할 야망을 버렸다. 그리고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가톨릭 국가인 에스파냐의 공격을 격퇴했다. 그때 이래 1914~18년의 제1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대륙 문제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는 것이 영국 외교 정책의 기본적이자 시종일관 목표의 하나였다. 그러나 소수자인 이 세 지역 국가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공통의 정 책을 실행하기 좋은 위치에 놓여 있지 않다는 점이다. 스위스의 산맥이나 네덜란드 제방의 장벽 효과는 영국 해협에 뒤져 있었다. 네덜란드는 루이 14세와의 전쟁에서 완전히 재기할 수 없었고,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한때 나폴레옹 제국에 병합되었다. 게다가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또 하나 다른 점에서, 앞서 말한 문제 해결을 발견하는데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둘 다 완전한 중앙 집권 민족 국가가 아니고 느슨하게 결부된 '칸톤'(스위스의 주)이나 도시의 연합에 불과했다. 이런 이유로 1707년의 영국•스코틀랜드 양 왕국 합체 후에는, 대영제국이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 역사의 제3기 당시 제2기에 이탈리아가 행했던 것 과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무렵 이탈리아 자신이 도시 국가라는 단위의 한계를 넘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던 일이며, 그 고립기 마지막 무렵에는 독립된 도시 국가들이 정복 행위에 의하여 8개 내지 10개의 비교적 큰 연합 조직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두 가지 점에서 불충분한 것이었다.
전제정치로 인해 도시 국가제의 정지척 장점 상실
첫째로 이들 새로운 이탈리아의 정치 단위는 물론 이전에 비하면 커졌으나 그래도 아직 침략기가 개시되었을 때에 '야만인'에 대항하여 자기 자신을 지키기에는 너무 작았음이 드러났다. 둘째로는 새로 등장한 이들 큰 국가에 있어 발달한 정치 형태는 항상 전제 정치였으며, 그것으로 인해 도시 국가제의 정치적 장점이 상실되었다. 알프스 북쪽의 커다란 정치 단위에 손쉽게 적용된 것도 새로이 발달한 이러한 이탈리 아식 전제 채재였다. 그러나 겉보기에 발전이라 여겨진 이 방향은 결국 막다 른 길이었다. 어떤 형태든 정치적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않는 한 알프스 너머의 나라들은 이전의 이탈리아의 경제적 달성, 즉 도시 국가 체제 아래 이탈 리아에서 이루어진 농업에서 상공업으로 발전한 선진 경제를 모방하는 것이 곤란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프랑스나 에스파냐와 달리, 전제 군주제가 발달함으로써 효과 적인 응전을 환기시키는 자극이 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전제 군주제에 의한 응전이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에스파냐는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라는 공통으로 이어받은 정치 조직체의 전통적 제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새로운 기능을 발휘하게 하였다. 알프스 너머 멀리 떨어진 유럽의 전통적인 제도 중 하나는 불평을 말할 기회를 주는 동시에, 근거 있는 불평은 반드시 개선한다고 국왕이 서약해 주는 대신 국왕을 위해 필요한 경비를 지출하는 것인데, 이런 이중의 목적을 위해 정기적으로 열리는 국왕과 국민 각 계층 사이의 의논 또는 회의가 이 제도의 방식이었다. 이 제도가 차차 발달해 가 는 동안에 알프스 너머의 여러 왕국들은 지역 간의 물적 규모의 문제 -전원 참가가 곤란하다는 수와 거리의 문제-를 '대표제'라는 방식으로 법안을 발 명 또는 재발견해서 극복했다. 의회에서 심의되는 사항에 관계있는 모든 사람이 직접 스스로의 의사를 내세워 참가할 의무 또는 권리-그것은 도시 국가에서는 자명한 의무 또는 권리인데 방대한 봉전 왕국에서는, 참가하는 대리인이 대표권과 의회가 열리는 곳까지 대리인의 여행 경비를 부담하는 의무로 약화되었다. 정기적으로 대표자가 모여 협의하는 이 봉건 시대의 집회 제도는 국왕과 그 백성들 사이의 연락 기관 역할을 다하는 본래의 목적에는 아주 적합한 제도였다. 그러나 국왕 자체의 기능을 인수하여 국왕을 밀어내고 정치 권위의 주요한 원동력으로서 왕의 기능을 빼앗기에는 본래부터 적합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 17세기 영국에서는 이 모임을 그러한 일에 성공적으로 적용시켰다. 영국이 같은 시대의 알프스 너머 멀리 떨어진 다른 왕국들의 거센 도전을 멋지게 극복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영국이 대륙의 봉건 제도를 벗어나 국민 국가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 역사의 제2기, 즉 중세에 있어서 강력했었던 영국의 군주 정치를 제3기에 와서 의회 정치가 대신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해도 단순한 역설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다른 어떤 나라도 제2기에 있어 정복왕 윌리엄이나 헨리 1세, 2세, 그리고 에드워드 1세, 3세가 휘두른 것과 같은 강대한 권력과 준엄한 지배력을 경험한 나라는 없었다. 이러한 강력한 통치자 밑에 영국은 프랑스 나 에스파냐, 독일보다 먼저 국민적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공화정이 국민적 통일에 이바지할 수 있었던 요인
왕정을 대신할 수 있는 강력한 공화정이 국민적 통일에 이바지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런던의 우월성이었다. 다른 어느 서유럽의 알프스 너머 멀리 떨어진 왕국에 있어서도 단 하나의 도시가 다른 모든 도시를 이토록 완전하게 압도하여 작아 보이게 한 예는 없었다. 17세기말에는 영국의 인구가 아직 프랑스나 독일에 비하면 과잉 문제가 되지 않았고, 에스파냐나 이탈리아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런던은 이미 유럽에서 거의 가장 큰 도시로 되고 있었다. 사실 영국이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체제를 전국민적 규모의 시민 생활에 적용시킨다는 문제를 해결한 것은, 국토의 협소와 견고한 국경, 강력한 국 왕, 그리고 한 대도시 단독의 우월성 등으로 인해 이미 다른 어느 알프스 너머의 국가 보다도 더욱 대형으로 한 도시 국가의 통제와 국민적 자각 비슷한 것을 달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들 유리한 조건을 충분히 고려한다 하더라도 영국이 르네상스 기의 이탈리아의 행정 능력이라는 새로운 포도주를 중세 알프스 너머 제국의 의회 제도라는 낡은 가죽 부대에 가득 넣고, 더구나 그 낡은 가죽 부대가 터지는 것을 막은 건 경탄할 만한 '곡예'라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정 치적 승리였다. 그리고 이 의회기관의 본질이 정치 비판에서 정치 집행 기관으로 전환한 다는 정치적 '곡예'를 영국의 창조적 소수자가 서유럽 사회를 위해 이룩한 것은, 영국이 대륙 문제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고 있었던 은퇴의 제1기, 즉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와 17세기의 태반에 걸친 기간 중의 일이었다. 루이 14세의 도전에 응하여 말버러 공의 멋진 지휘 아래 영국이 부분적으로 또한 일시적으로 대륙의 싸움터에 복귀했을 때, 대륙의 여러 국민들은 이 섬나라의 주민이 이룩한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편 프랑스 인이 '영국 심취 시대'라고 부른 시대가 시작되었다. 몽테스키외는 영국인의 공업을 칭 찬하였으나 오해했다. 입헌 군주제 예찬을 상징하는 '앵글로마니'가 프랑스혁명을 폭발시킨 한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19세기에서 20세기로 이행하는 동안 점차 정치적 부작용에 의한 혐오스러운 군더더기가 생기기 시작하자 동시대 지구상의 모든 국민들은 그 정치적 나신을 의회 제도라는 무화과 잎으로 감 출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이 서유럽 사회 역사의 제3기 마지막에 널리 행해진 영국의 정치 제도 찬 양은 분명 제2기의 마지막, 즉 15세기에서 16세기의 이행기에 있었던 이탈 리아 찬양에 대응하는 것인데, 영국인이 이탈리아를 찬양했다는 가장 명백 한 예증은 셰익스피어의 극들 중 가공의 제재를 다룬 극의 4분의 3까지가 이탈리아의 이야기에 의거하여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셰익스피어는 「리처드 2세」 속의 이야기에서 자신이 주제로 선택한 '이탈리마니'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을 비꼬고 있다. 그는 멋진 요크 노공의 입을 통 하여, 우매한 젊은 국왕은 뽐내는 이탈리아 유행 풍문에 현혹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들은 느림보이고 남의 흉내만 내고 싶어 하며 여전히 그 풍속을 뒤쫓고 한심한 모방에 허송세월을 보낸다고 말한다. 셰익스피어는 그가 시종 능란하고 태평하게 사용하는 냉소적 시대착오주의로 오히려 그 자신의 시대의 특징이었던 현상을 초서 시대의 일이었던 듯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초서와 그 시 대가 이탈리아 심취 시대의 시작이었기는 했지만 말이다. 영국인이 발명한 의회 정치라는 정치 제도가 나중에 산업주의를 위해 참으로 안성맞춤인 사회적 배경을 제공했다. 행정 담당자가 국민의 대표인의 회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정치 조직이라는 의미로서의 '민주주의'와, 공장에 집중한 '손'(노동자)에 의한 대량 생산 조직이라는 의미로서의 '산업주의'는 가장 주요한 현대의 두 가지 제도이다. 민주주의와 산업주의, 이 두 가지 제도가 널리 행해지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문화가 달성한 정치적•경제적 사업을 도시 국가적 규모에서 왕국적 규모로 옮기는 문제를 위하여 서유럽 사회가 당시 발견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해결법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해결법은 다 함께 후세에 영국의 정치가 한 사람이 '영광스러운 고립'이라 부른 정책을 취하 고 있었던 시대의 영국에서 성취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