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을 지배하는 힘, 재액의 참된 원인. 문명의 쇠퇴는 자연적 환경에 대한 지배력의 상실에 의한 것 인지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문명의 쇠퇴, 자연적 환경에 대한 지배력 상실
자연적 환경 문명의 쇠퇴는 인간의 지배 밖에 있는 우주적인 힘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은 이상으로 충분히 입증되었으나, 아직 우리는 이 재액의 참된 원인을 규명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우선 사회의 쇠퇴는 환경을 지배하는 힘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전에 행한 구분 방식을 채용하여 자연적 환경과 인간적 환경의 두 가지로 환경을 나누어 취급하기도 한다. 문명의 쇠퇴는 자연적 환경에 대한 지배력의 상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일까? 어떤 사회가 자연적 환경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배력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은 앞서 지적한 대로 그 사회의 기술적인 측면에 의해 잴 수가 있다. 그런데 앞서 '성장'의 문제를 고찰했을 때 확인한 바와 같이 하나는 문명의 성쇠를 나타내고, 또 하나는 기술의 성쇠를 나타내는 두 조의 커브를 그려 보면, 두 조의 커브는 단지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한 차이를 나타 낸다. 문명이 정지하거나 쇠퇴해 감에도 불구하고 기술이 향상해 가는 경우와, 어떤 때는 문명이 앞을 향해 또는 뒤를 향해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기술이 정지하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자연적 환경에 대한 지배력의 상실이라는 것은, 문명의 쇠퇴를 판정하는 기준이 되지 않음을 증명한 셈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증명을 완전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문명의 쇠퇴와 기술의 퇴보가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에 대해, 기술의 퇴보가 문명 쇠퇴의 원인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실 기술의 퇴보가 다른 요소의 원인이 아니라 실질적 결과 또는 징후였음을 알 수 있다. 문명이 쇠퇴기에 들어가면, 성장기 동안은 실행 가능하여 이익을 가져왔던 어떤 특정 기술이 사회적 장해에 부딪혀 그 경제적 이익이 감소하기 시작하는 일이 있다. 이익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의식적으로 포기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경우에 방금 말한 것과 같은 사정으로 인해 그 기술을 포기하는 것은 그 기술을 실행할 능력이 상실된 때문이며, 그 기술적 능력의 상실이 문명 쇠퇴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원인과 결과의 일반적 순서를 완전히 바꾸는 것이 된다. 명백한 예는 서유럽에서의 버려진 로마의 도로인데, 그것은 분명히 로마 제국의 쇠퇴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로마 도로가 버려진 것은 기술적 능력 이 감퇴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 도로를 필요로 하는 군사•상업상의 목적을 위해 이들 도로를 만든 사회가 붕괴했기 때문이다. 도로 건설의 기술뿐 아니라, 경제생활의 기술 전체를 살펴보아도 헬라스 세계의 쇠퇴와 몰락의 원인을 기술의 퇴화 속에서 발견할 수는 없다. "고대 세계의 쇠퇴를 경제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배척되어야 한다. 고대 생활의 경제적 단순화는 우리들이 고대 세계의 쇠퇴라고 부르는 것의 원인이 아니고, 좀 더 일반적인 현상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가장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시정의 실패와 중산 계급의 몰락'이다. 로마 도로를 방치하는 것과 유사한 예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티그 리스•유프라테스 유역의 충적층 델타 지대에 있는 관개 시설의 부분적 표이다. 이 관개 체계는 로마 도로보다도 훨씬 역사가 깊다.
기술 문제의 퇴보, 인구와 번영의 감퇴
7세기에 이들 수리 시설은 서남 이남의 광대한 지역에 일어났던 홍수에 파괴되어 쓸모없이 되고 난 후 보수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 후 13세기에는 이라크의 관개 시설 전 체가 황폐된 대로 버려졌다. 왜 이라크의 주민들은 이 두 번의 기회에 그들 의 조상이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훌륭하게 유지해 온 시설이자, 이 나라 농업의 생산력과 다수 인구의 생활을 지탱케 해 준 시설은 파괴되지 않게 보존하기를 포기하였는가? 이 기술 문제의 퇴보는 사실 인구와 번영의 감퇴가 그 원인이 아니라는 결과이며, 인구와 번영의 감퇴 자체는 갖가지 사회적 원 인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다. 7세기와 13세기는 다 같이 이라크에서 시리아 문명이 심히 쇠퇴한 시기였 다. 그 결과 전반적으로 극도의 불안 상태가 조성되어 아무도 치수 관계 사 업에 투자할 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뿐더러, 에너지를 쏟아부을 동기를 갖는 자도 없었다. 7세기의 기술적 쇠퇴의 진정한 원인은 기원 603~628년 의 로마•페르시아 전쟁이었고, 그 뒤 잇단 초기 이슬람교 아랍족의 이라크 침략이었다. 그리고 13세기의 경우 1258년에 시리아 사회에 마지막 일격을 가한 몽골족의 침략이 있었다. 실론 섬에서도 실증적 관찰 결과 발견된 주목할 만한 유적을 조사하면, 역 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오늘날 실론에서 인도 문명의 폐허가 된 유적이 있는 지역은 끊임없이 가뭄에 시달려 왔으며, 현재 말라리아 발생지와도 일치한다. 이와 같이 오늘날, 급수 상황이 기껏해야 아노펠레스 모기가 살기에는 충분하지만 농작물을 재배하는 데는 불충분한 상 태에 놓여 있는 곳인데, 일찍이 문명이 번성했다는 것은 얼핏 보기에 기묘한 대조가 이날 수 없다. 실론 섬의 인도 문명 개척자가 그들이 경탄할 만한 급수시설을 건설할 때, 이미 말라리아가 만연하고 있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사실 말라리아는 관개 시설이 파괴된 결과 생겨났으며 그 건설 전에는 없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가 있다. 실론 섬의 이 지방이 말라리아 발생 지가 된 것은 관개 시설이 붕괴되면서 지난날 인공적 수로가 탁한 물웅덩이로 점차 변화하자, 흐르는 물에 살면서 장구벌레의 발생을 막아주던 물고기 가 그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도 사회의 관개 시설이 버려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끊임없는 전쟁 중에 제방이 파괴되고 수로는 막혔다. 이들 시설은 군사 목적을 달성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침략자의 손에 의해 고의로 파괴되었다. 그래서 전쟁에 지친 이 지방의 주민들은 앞으로도 전쟁에 의해 또 파괴될 제방을 다시 복구할 기력이 생기지 않았다. 이처럼 이 경우에 있어서도 기술적 요인은 결 국 사회적 원인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일련의 사회적 인과 관계가 이루 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수적•종속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실론 섬의 인도 문명 역사에 일어난 이상의 사건과 지극히 유사한 예가 헬 라스 문명의 역사에서도 있었다. 여기에서도 역시 벌써 소멸한 이 문명이 한 때 가장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고, 가장 활발한 활동을 발산했던 지역의 여러 곳이, 말라리아의 늪지로 변했다가 개간된 것이 발견된다. 적어도 2천 년 동 안 역병을 발생시키는 늪지대를 1887년 영국의 한 회사가 간척한 코파이스 소택드 시민들을 먹여 살린 경작지였다. 또 오랫동안 황무지로서 무솔리니 정권 때 간척되어, 또다시 사람이 살게 된 폼프티노 소택지에는 일찍이 많은 볼스키의 도시와 라틴의 식민지가 있었다. 현재도 헬라스 문명 쇠퇴의 원 인인 '기력의 상실'은 헬라스 문명의 두 근원지 말라리아가 침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 두 이탈리아 지역에 서도 인도의 실론과 같이 말라리아가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들 지역의 융성했던 문명이 전성기를 지내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이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현대의 어떤 권위자는 그리스에서 말라리아가 풍토병이 된 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일이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라티움에서 이 병이 맹위를 떨치게 된 것도, 역시 한니발 전쟁 이후의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알렉산드로스 직후 시대의 그리스 인과 스키피오 형제, 그리고 카이사르 부자 시대의 로마 인이 기술적으로 그들보다 열등했던 조 상들로 해결한 코파이스 소택지와 폼프티노 소택지의 배수 문제를 기술적 무능 탓으로 돌린다는 얘기는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다.
사회생활의 붕괴, 사회적 해약의 결합
이 그릇된 설명에 대한 반박은 기술면에서가 아니고, 사회면에서 발견해 낼 수가 있다. 한니발 전쟁과 그 뒤 계속되는 다음 2세기 간에 행해진 로마의 침략 전쟁과 내전은, 이탈리아의 사회생활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농민 문화와 농민 경제가 먼저 그 기초를 무너뜨리고 마지막으로 한니발이 가져온 황폐와 끊임없는 농민 병역 동원, 자영자급 농민의 소규모 농업을 대신하는 노예 노동에 의한 대규모 농업이 출현하는 농업 혁명, 농촌으로부터 기생적인 존 재가 되어 도시로 대량 이주 등, 몇 개인가의 유해한 힘이 쌓여서 사회생활이 일소되었다. 이들 사회적 해악의 결합이 한니발의 시대로부터 성 베네 딕투스의 시대에 걸친 7세기간에, 이탈리아에서는 인간이 후퇴하고 모기가 진출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의 경우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기인한 것과 같은 해악이 겹친 것은 폴리비오스의 시대에, 그 뒤 이탈리아보다 훨씬 극 심한 인구 감소를 가져왔다. 폴리비오스는 그의 유명한 구절에서, 낙태 혹은 영아 살해에 의한 가족 수의 제한을 당시 그리스의 사회적. 정치적 몰락의 주요한 원인으로 들고 있다. 따라서 코파이스 평야가 폼파티 노 평야와 같이 곡창지대에서 모기 소굴로 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토목 기술의 퇴보와 같은 것을 들고 나올 필요가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토목 공사와 같은 실제적 기술에서 눈을 돌려 건축•조각• 회화•서도 •문학 따위의 예술적 기술을 살펴보아도 우리는 같은 결론에 이른다. 이를테면 헬 라스 사회의 건축 양식은 어째서 기원후 4세기부터 7세기 사이에 와서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는가? 오스만 튀르크 인은 어째서 1923년에 아라비아 알파 벳을 내던졌는가? 세계 거의 모든 비서유럽 사회들이 오늘날에 와서 전통적인 복장과 예술을 버리려고 하고 있는가. 먼저 이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서유럽 자신들에게 적용하여, 서유럽의 전통적 음악•무용•회화•조각의 양식이 젊은 세대의 대부분에 의해서 버려져 가고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