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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유럽과 힌두 문명 세계

by 공부하는 샤샤 2026. 6. 12.

근대 서유럽과 힌두 문명 세계. 힌두 세계가 근대 서유럽과 만났던 때를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근대 서유럽과 힌두 문명 세계
근대 서유럽과 힌두 문명 세계

힌두 세계가 근대 서유럽과 만났던 때의 사정

힌두 세계가 근대 서유럽과 만났던 때의 사정은 몇 가지 점에서 그리스 정교 사회 본체가 같은 경험을 했을 때와 아주 비슷하다. 이 두 문명은 이미 세계 국가의 단계에 들어가 있었고, 또 정치 체제는 이란 이슬람교 문명에 속하는 외래 제국 건설자에 의하여 강요당하는 상황이었다. 무굴 제국 시대의 인도에서도, 또 오스만 제국 시대의 그리스정교 세계에서도 이슬람 지배에 복종하고 있었던 주민들은 근대 서유럽 문명이 지평선상에 모습을 나타내기 전까지 그들 지배자의 문화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지역 주민들은 모두 그 후 서유럽 사회의 세력이 눈에 띄게 증대하고 이슬람 사회의 세력이 쇠퇴해 감에 따라 나중에 떠올라온 별에 마음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의 유사점은 이에 못지않은 상이점을 두드러지게 드러 낸다. 이를테면 오스만 제국의 정교도들이 서유럽에 마음을 돌릴 때에는 앞서 중세 서유럽 사회와 만난 불행한 경험에서 유래하는 전통적인 반감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런데 힌두 교도들은 같은 모양의 문화적 방향 전환을 행함에 있어, 잊어야 할 불행한 기억을 갖지 않았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 (폴레간의)가 캘커타에 상륙했을 때를 기점으로 시작되는 힌두 세계와 서유럽과의 만 남이 사실상 이 두 문명사회 사이에 일어난 최초의 접촉이었다. 만남 이전에 있었던 차이보다는 훨씬 큰 차이가 만남 이후에 나타났다. 그 리스정교 사회의 역사에서 외래의 세계 국가는 멸망할 때까지 그것을 건설 한 이슬람교도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으나, 이에 반해 무굴 제국은 이 제국을 건설한 티무르 왕조 무장들의 무능한 후계자들이 통일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뒤에, 영국 실업가의 손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이들 영국 실업인들이 악바르의 후임으로 들어앉게 된 것은, 만약 영국인 이 선수를 치지 않으면 서유럽 인이 인도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데 불가결한 조건인 법과 질서 체제가 경쟁 상대인 프랑스에 의해 재포장될 것 같은 형세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힌두 세계의 서유럽화는 인도가 서유럽의 지배하에 있었던 시기에 가장 중대한 단계에 들어갔다. 따라서 인도에서는 근대 서유럽 문화의 수용 경로가 러시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위에서 아래로 미쳐갔던 것이며, 오스만 치하의 그리스정교 사회처럼 밑에서 위를 향해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힌두 사회의 브라만과 반야(1)의 두 카스트 계급 은 러시아를 제외한 정교 사회의 역사에서 투르크게 그리스 인이 못다 한 역할을 힌두 사회의 역사에서 다하는 데 성공했다. 인도의 모든 정치 체제 밑에서 국정을 담당하는 장관의 자리에 앉는 것은 브라만 계급의 특권의 하나로 되어 있었다.

 

인도 문명 세계와 그 자식 문명인 힌두 사회

인도 문명 세계와 그 자식 문명인 힌두 사회에서도 그러했지만, 무갈 왕조 이전의 이슬람교도 지배자나 무굴 인 자신 역시 그들이 대신 들어앉은 힌두 제국가의 예를 따르는 편이 형편에 좋다는 것을 알았다. 브라만 계급 출신의 인간이 이슬람교도 지배자를 섬기는 장관 이하의 관직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 이 외래자의 지배에 대한 힌두 인들의 반감을 완화했다. 영국령 인도 정부 역시 무굴 왕조와 같은 반감 완화의 방법을 따라서, 영국인의 경제 활동도 반야 계급에 대하여 같은 기회를 제공했다. 인도의 통치권이 영국인의 손에 넘어간 하나의 결과로써, 영국인이 페르시아어 대신 영어를 인도 제국의 공용어로 하고, 또 고등 교육의 수단으로 서 페르시아 어나 산스크리트 어의 서적보다는 서유럽 어로 써진 서적을 우선한 정책은 힌두 사회의 문화사에서 표트르 대제의 서유럽화 정책이 러 시아의 문화사에 미친 것과 같은 정도의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양측 다 세 계 국가의 독재적 정부에 의해 명령으로 서유럽적 생활의 외관을 꾸미는 일 이 유행한 예가 되었다. 상층 카스트에 속하는 힌두 인은 인도 정부가 영국령 인도의 관리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정한 서유럽식 교육을 받게 되었다. 실업과 정치의 서유럽화에 따라 인도에는 대학 교수와 변호사라는 두 종류의 서유럽적인 자유 전문직이 생겼고, 또 사기업에 기초를 두는 서유럽화 한 실업계에서도 가장 유리한 자리를 유럽에서 온 영국인이 독점할 수는 없었다. 힌두 사회에 출현한 이 새로운 분자(영국)가 오스만 치하의 정교 세계에 서의 투르크계 그리스 인처럼, 세계 제국 밑에서 생활하고, 세계 제국을 건 설한 외래자로부터 그 제국을 이어받고, 당시 유행한 국가 형태에 따라 서유럽화하고 있는 세계 지방 국가의 하나로 개조하려는 희망을 품게 된 것은 피하수 없는 일이었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의 전환기에 그리스 인들은 오스만 제국을 18세기적인 계몽 군주국으로 변혁시키는 것을 꿈꾸었는데, 서유럽화를 지향하는 힌두 세계의 정치적 지도자는 19세기에서 20세기에의 전환기에 변화된 서유럽의 정치사상에 경의를 표하고, 영국령 인도 제국을 민주주의적인 서유럽식 민족 국가로 고치는 훨씬 곤란한 과제를 스스로 떠맡았다. 필자가 이 부분을 쓸 때는, 1947년 8월 15일에 인도의 통치권이 영국인의 손에서 인도인의 손에 이양된 지 채 5년도 경과하고 있지 않았을 때인 만큼 아직 이 기도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측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일렀다. 그래도 이미 영국인이 인도아대륙에게 준, 아마 가장 귀중한 선물인 정치적 통일을 될 수 있는 대로 보존하려는 노력에서, 힌두 인의 정치적 수완은 호의를 보내는 외국인이 기대한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사태 진전을 지켜보던 많은 영국인은, 영국령 인도 제국 멸망 후 이 대륙 전체가 '발칸화'한다고 예언했지만, 이 예언은 맞지 않았다. 단지 하나, 힌두인의 처지에서 보아 통일의 손상을 입은 것은 '파키스탄의 분리'였다. 인도의 이슬람교도가 파키스탄의 독립을 고집한 동기는 그들 스스로가 약하다는 자각에서 온 불안이었다. 그들은 18세기에 무굴 제국이 칼을 믿고 획득한 지배권을 칼의 힘에 의해 유지할 수 없었던 일을 잊지 않았다. 또 만약 영국의 무력 간섭에 의하여 인도 정치사의 진로가 바뀌지 않았더 라면, 같은 이유로 무굴 제국의 옛 영토의 태반이 마라타족 (의는 현역 설에 건지)이나 시크교도의 힌두 후계 국가의 것이 되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 인도 무굴 제국의 이슬람교도가 영국령 인도 시대에 끊임없이 되풀이된 힌두와의 분쟁에서 중개 역할을 한 영국인으로부터 칼이 아닌 펜으로 경쟁하도록 명령받았을 때에도 역시 힌두 교도에게 뒤진 것을 알았다. 이상의 이유에서 인도의 이슬람교도들은 1947년에 그들만의 별개 후계 국가를 세울 것을 고집했던 것인데, 그 때문에 생긴 인도의 분할은 19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분할이 초래한 비극적인 결과를 재현할 우려가 있었다. 지리적으로 뒤섞여 있는 민족을 지역적으로 별개의 민족 국가로 나누려고 하면 행정적 견지에서 보나 경제적 견지에서 보나 참으로 못마땅한 경계선을 긋는 것이 된다. 비록 이 희생을 참아냈다 하더라도 경계선 반대쪽엔 막 대한 수의 인간이 소수 민족으로서 남겨지게 된다.

 

인도와 파키스탄, 카슈미르의 귀속을 둘러싼 국경 충동

낭패한 수백만이란 난민 이 집과 재산을 버리고 도망쳐, 힘들고 고된 이주의 나그네 길에서 증오를 품고 있는 적에게 습격당하면서 처음부터 생활을 다시 시작해야 할 미지의 지방에 알거지 신세로 겨우 당도한다. 더욱 난처하게도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의 일부에선 카슈미르의 귀속을 둘러싼 선전 포고 없는 국경 충돌이 일어났다. 그러나 1952년까지의 상태에서는 델리와 카라치 양정부의 노력이 주효하여 인도는 오스만 제국이 더듬은 치명적인 길을 걷는 것은 면했다. 따라서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인도의 전도는 단기의 정치적 견지에서 보면 전반적으로 밝은 것이었다. 만약 여전히 근대 서유럽의 영향이 힌두 세계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한다면, 그 위험은 정치적인 면이 아니라 생활의 근거인 경제면이나 심층에 해당하는 정신면에 생긴다고 해야 할 것이며, 언젠가는 이러한 면에서 위기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힌두 세계가 걱정할 서유럽화의 분명한 위험은 두 가지이다. 첫째, 힌두 문명과 서유럽 문명에는 공통된 문화적 배경이 거의 없다. 둘째, 외래 근대 서유럽 문호의 지적 내용을 습득한 힌두 인은 막대한 수의 무지하고 빈곤한 농민들의 등에 업히는 극히 약간의 소수자에 불과하다. 서유럽 문화 침투과정이 이 수준에서 정지할 리가 없고 그 밑에 있는 농민 대중에게 영향을 미 치기 시작하면, 반드시 거기에서 새로운 혁명적 결과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힌두 사회와 근대 서유럽의 문화적 차이는 단순히 다르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 근대 서유럽이 그 문화적 전통을 세속적인 형태로 개조하고 거기에서 종교를 배제한 데 대하여, 힌두 사회 쪽은 사실 광적인 신앙의 비난 즉 '지나치게 종교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큼 그토록 철저하게 종 교적이었고 지금 역시 그렇다. 이 열렬하게 종교적인 인생관과 의식적으로 세속적인 인생관의 대립은 종교 간의 상호 차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이 점에서 힌두교•이슬람교•중세 서유럽 그리스도교의 세 문화 사이는, 이들 문화 중 어느 것과 근대 서유럽의 세속적 문화 사이보다도 일치하는 데가 많다. 이 공통된 종교성에 바탕을 두어 힌두 교도는 동벵갈 지방의 이슬 람 교도나 고아 지방의 로마 가톨릭교도의 예에서 보듯이 참기 어려운 정신 적 긴장을 경험하는 일 없이 이슬람교나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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