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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유럽과 이슬람 문명 세계

by 공부하는 샤샤 2026. 6. 13.

근대 서유럽과 이슬람 문명 세계. 서유럽사의 근대기 시대와 이슬람교 문명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근대 서유럽과 이슬람 문명 세계
근대 서유럽과 이슬람 문명 세계

 

서유럽사의 근대기의 시작, 아람 이슬람교의 문명

서유럽사의 근대기가 시작될 무렵, 등을 맞대고 있던 두 이슬람 사회가 서유럽 사회나 러시아 사회에서 구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가는 일체의 육상교 통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랍 이슬람교 문명은 15세기말에도 계속 지브롤터 해협에서 세네갈에 이르는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 일대를 석권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는 열대 아프리카에 달하는 육로를 차단당했지만, 아랍 문명이 미치는 여파는 사하라 사막에서 수단 스텝의 북부 일대에 이르는 경로뿐만 아니라, 인도양에서 동해안의 '사와 힐' 지방에 이르는 경로를 통하려 '검은 대륙'에 밀려들고 있었다. 실제로 인도양은 아랍 사회의 호수나 마찬가지여서 이집트 중개 상인을 상대로 하는 베네치아의 무역 상들은 이 수역의 출입이 막혀 있는 반면, 아라비아의 선박만큼은 수에즈에 서 소팔라 (동아프리카의 항구)에 걸쳐 아프리카 연안을 마음대로 항해하였을뿐더러 인도양을 횡단하여 인도네시아에 도달해 이 열도의 힌두교를 이슬람교로 바꿔 놓고, 다시 동쪽으로 진출하여 남부 필리핀의 이교를 받드는 말레이계 주민을 개종시킴으로써 서태평양에 거점을 확보했다. 같은 무렵, 이란의 이슬람 문명은 한층 더 견고한 전략적 요점이라 생각되는 지역을 영유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 건설자들 콘스탄티노플•모레아 지 방•카라만 (아의'이후부와의)•트레비존드 (홀리아의 항구)의 각 지점을 점령했다. 또 크리미아의 제노아 식민지를 탈취하여 흑해를 오스만 제국의 호수로 만들었다. 다른 투르크 어계 이슬람교 민족들은 이슬람의 세력 범위를 흑해에서 볼가강 중류 지역까지 확대했다. 그리고 이 서부 경계선을 등지고 이란 문명 세계는 동남 방향으로 중국 서북의 간쑤성•산시성까지, 또 이란과 힌두스탄을 넘어 벵골지방과 데칸 반도까지 확대되었다. 이 광범위한 이슬람 문명에 의한 교통 차단은, 갇힌 두 그리스도교 사회의 개척자 집단에게도 도전이 되어 그에 상응하는 정력적인 응전을 야기시켰다.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대서양 연안에 사는 사람들은 15세기에 초에는 대삼각 범선을, 훗날에는 종범선이 다소 섞여 있었으나 3개의 마스트와 횡 범 장치를 지니고 있어 몇 달 동안 항구에 들르지 않고도 항해를 계속할 수 있는 신형 외양 항해용 범선을 고안해 냈다. 포르투갈 항해자들은 이 같은 배를 타고 시험적 항해를 떠나 1420년경에 마데이라 제도, 1432년에 아조레스도들 발견한 뒤에는 대서양면하는 아랍 연안을 우회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471년에는 에콰도르에 도착했으며, 1487~88년에는 희망봉을 돌아 1498년에는 인도 서안의 캘커타 에 상륙하였다. 1511년에는 말라카 해협을 지배하고 다시 서태평양에 진출하여, 1516년에는 광동에, 1542~43년에는 일본 연안에 자기 나라 국기를 휘날리는 데 성공했다. 삽시간에 포르투갈 인은 아랍 인의 손에서 인도양의 '해양권'을 탈취한 것이다. 이처럼 포르투갈인 개척자들이 아랍 이슬람 세계의 남쪽을 우회하여 동 방으로 서유럽 문명 세계를 확장해 가는 동안에, 나룻배를 젓는 카자흐인들이 이란 이슬람 세계의 북쪽을 우회하여 역시 동쪽을 향해 파죽지세로 러시 아 세계의 경계를 넓혔다. 그들의 진출에 도움이 되어 준 것은 1552년, 모스크바 제국의 황제(차르) 이반 4세에 의한 카잔 정복이었다.

 

이란 사회와 아랍 사회의 합류

카잔은 이란 이슬람 세계의 동북단 요새였으나 이 요새가 함락된 뒤로, 유목 전투 인종인 카자흐에게는 친숙한 삼림과 빙설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이들 러시아 그리스정교 세계의 개척자들은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 수로를 따라 동쪽으로 진출, 1638년에 태평양에, 그리고 1652년 3월 24일에 만주 제국의 동북 변경 지역에 이르렀다. 이 새로운 경계선에 도달할 무렵, 팽창하는 러시아 세계는 이란 문명 세계뿐 아니라 유라시아 초원 지대 전체의 바깥쪽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란 사회와 아랍 사회가 합류하여 성립한 이슬람 문명 세계는 불과 1세기도 되지 않는 단기간에 간단히 남북으로 우회당했을 뿐 아니라, 주위마저 완전히 포위당해 버렸다. 16세기말부터 17세기로 넘어가는 단계에 이미 끈은 완전히 피해자의 목둘레에 감겨 있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이슬람 세계가 이처럼 단시일 안에 금방이라도 교살당할 것 같은 상태로 빠져든 일보다 오히려 이슬람의 적과 이슬람교도 자신이 이 형세를 알아차리고 어떤 행동을 취할 때까지 대단히 오랜 시간이 경과했다는 사실이다. 즉 서유럽과 러시아는 겉으로 보기에 도저히 손댈 수 없을 것같이 보이는 미끼에 여간 해선 덤벼들려 하지 않았고, 또 이슬람교도 쪽도 절망적으로 보이는 궁경을 탈피하기 위한 행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1952년 당시까지도 '다르-알-이슬람'(의꽃입교도)은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몇 지방을 빼앗겼을 뿐 대체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집트에서 아프가니스탄, 터키에서 예멘에 달하는 중앙 부분은 외국의 정치적 지배는 물론 모든 통제를 모면해 왔다. 이집트•요르단•레바논•시리아·이라크 등 여러 나라는 1882년과 1914~18년의 대전 중에 차례로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에 굴복했으나, 그 후 재차 독립을 회복했다. 현재도 아랍 세계의 중심부에 대 한 위협이 남아 있다고 하면, 그것은 서유럽 제국의 위협이 아니라 시온주의 자의 위협이다. 이슬람교 여러 민족의 '서유럽 문제'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는 단서는 세 가지 점에서 발견된다. 근대 서유럽 문화의 충격이 그들 생활에서 가장 중요 한 문제가 되었을 때 이슬람 세계 사람들은 정치적 자주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또 위대한 군사적 전통의 계승자인 바, 그 군사적 전통이야말로 이슬람 문명의 가치 보증으로 보고 있었다. 따라서 후년에 그들이 자랑으로 삼는 군사력의 쇠퇴가 군말 없는 패전의 논리에 의해 증명된 일은 그들에게 참으로 뜻밖의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이슬람 교도는 자기 무용을 의지하는 그러한 고질적인 태도 때문에, 1683 년의 빈 공략이 실패한 것을 계기로 그들의 군사적 세력이 쇠퇴해 가고 있음 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그 일을 통절하게 알게 된 것은 약 100년 뒤의 일이었다. 1768년에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간의 전쟁이 발발한 뒤 러시 아가 발트해에서 건조한 함대를 보낼 의도를 갖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투르크 인들은 발틱 함대가 실제로 도착할 때까지 발트해와 지중해 사이에 직통 항로가 있음을 도저히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로부터 30년 후에 맘루크의 무장 무라드 베이가 베네치아의 상인으로부터 나폴레옹의 몰타섬 점령이 이집트 원정의 전조일지도 모른다고 경고받았을 때도 여전히 그는 그 경고를 어리석은 망상이라고 일소에 붙였다. 18세기부터 19세기로 넘어설 때 오스만 세계는, 1세기 전의 러시아 세계 가 위에서 아래를 향한 서유럽화 운동을 이루기는 했지만 어쨌든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근대 서유럽과의 전쟁에 패한 뒤 군대의 개조가 이루어졌다. 오스만 정책과 표트르 정책은 적어도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서로 달랐다. 표트르 대제는 천재적인 통찰력으로써 서유럽화 정책은 '전부가 아니면 전무' 라야만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의 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단순히 군사면뿐만 아니라, 생활의 모든 면에 걸쳐 적용시켜야 한다 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앞서 말했듯이 러시아의 표트르 체계는 생활의 도회 적 상부 구조의 서유럽화에 성공했을 뿐, 농민 대중에게까지는 영향을 미칠 수 없어 결국 그 벌로 정권을 공산주의에 양도하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문화 운동이 완전히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좌절된 것은 표트르 대제의 판단에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러시아의 행정 기구에 충분한 추진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반해 터키에서는 1768년의 러시아-터키 전쟁 발발에서 1918 년의 제1차 세계대전 종료까지 1세기 반 동안 부득이 오스만 군대를 서유럽 화하는 정책을 채용했던 정부 당국자들은 차례차례 그들 방침의 잘못을 폭 로하는 쓰디쓴 경험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인 문화 요소를 받아들임에 있어, 취사선택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계속 품어 왔다. 이 기간에 오스만이 조금씩 얼굴을 찡그리면서 마신 서유럽화의 약에 대해 판정을 내린다면, '매회마다 너무 양이 적었고 때가 늦었다'는 혹평을 내릴 수밖에 없다. 1919년이 되자 겨우 무스타파 케말과 그 동지들이 표트르식 본을 받아 철저하게 서유럽화 정책에 착수하게 되었다.

 

메메트 알리에 의해 수행된 이집트의 서유럽화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만들어진 서유럽화한 터키 민족 국가는 본서 집필 당시 훌륭히 목적을 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의 다른 지역에 서는 아직 이에 필적할 만한 위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세기의 초반에 알바니아의 모험가, 메메트 알리에 의해 수행된 이집트의 서유럽화는 같은 세기 투르크의 술탄들이 시도하고 이행한 것에 비하면 훨씬 철저한 것이었지만, 그의 후계자 시대에 형편없이 되어 결국 본래의 문명과 모방한 문명 양쪽에서 가장 나쁜 특징만을 나타냄으로써 서유럽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혼혈아가 되어 버렸다. 훨씬 뒤떨어진 반야만적 왕국에서 무스타파 케말의 흉내를 내려고 했던 아프가니스탄의 아마눌라의 기도는 보는 사람에 따라 비극으로도 보일 수 있고, 희극으로도 보일 수 있지만, 하여간 실패의 평을 모면할 수 없는 실험이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중엽을 지난 오늘날의 세계에서 아마눌라의 시도와 같은 지방적인 실험의 성패 여부가 이슬람 세계의 장래를 결정한다는 것은 아니 다. 적어도 가까운 장래에 이슬람 세계의 전도는 이슬람 세계를 둘러싼 서유 럽 세계와 러시아 세계의 세력 분쟁 진행 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서로 다투는 이 두 세계를 보면 이슬람 세계는 내연 기관의 발명 이래 주요 물자인 석유의 공급원으로서, 또 주요 교통로로서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이슬람 세계는 그 속에 구세계의 제1세대 문명 4개 중 3개의 발상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절멸한 그들 문명사회가 전에는 손을 댈 수 없었던 나일 하루와 티그리스-유프라테스•인더스의 각 유역으로부터 빼앗았던 풍부한 농산물은 근대 서유럽의 치수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이집트와 펀자브 지방에서는 증가하고, 이라크에서는 어느 정도까지 옛 상태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의 경제 자원에 부가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금까지 농 업적으로 대수로운 가치를 지니지 않았던 지역에 석유의 지하 광산이 발견되어 이용하게 된 일이다. 이슬람 이전의 시대에 조로아스터 교도가 불을 떠 받들기 위해 불을 계속 붙여 종교적 용도에 이용하고 있던 자연 분출 유정이 장차 유망한 경제 자원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1723년 표트르 대제는 투기자의 눈으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 천재적 직감이 바쿠(러시아 제국의 유전 도시) 유전의 상업적 개발에 의해 뒷받침되게 된 것은 150년 뒤의 일이었지만, 그 후 속속 행하여진 발 견에 의해 바쿠는 이라크의 쿠르디스탄, 페르시아의 바크티야리스탄 (외 석남자의)을 경유하여 동남방으로 뻗쳐 있고, 전에는 전혀 무가치하다고 여 겼던 아라비아 반도의 여러 지역에 달하는 황금 사슬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렇게 일어난 석유 쟁탈전의 결과는 긴박한 정치적 정세를 낳았다. 왜냐하면 러시아가 획득한 카프카스의 유전 지대와 서유럽 제국이 획득한 페르시아 및 아랍 제국의 유전 지대와는 서로 사격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긴장 상태는 이슬람 세계가 재차 세계의 교통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을 띠게 되면서 한층 더 강화되었다. 러시아•대서양 주변의 서유럽 세계와 인도•동남아시아•중국•일본 간의 가장 짧은 노선은 모두가 이슬람 세계의 육지나 바다 또는 하늘을 통하는 것이다. 더구나 교통 지도상으로도, 석유 분포도상에서 보는 거나 마찬가지로 소련과 서유럽은 서로 접근하고 있어 갈등의 위험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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