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문명의 만남의 과정. 만남의 과정 중 문명사회의 개별적 만남과 만남의 연쇄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동시대 문명사회 만남의 연쇄적
동시대 문명사회의 만남은 개별적으로 가 아니라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있다는 것은, 기원전 5세기에 헤로도토스가 그 당시에 일어난 아케메네스 제국과 대륙 유럽 쪽 그리스의 독립 도시 국가 사이의 싸움에 대하여 말하려고 했을 때 발견한 사실이다. 그는 자기의 이야기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그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이 관점에서 보아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의 싸움은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 일련의 같은 성격이 충돌한 가장 새로운 사건이란 것을 알았다. 침략을 받은 피해자는 단지 자기를 방어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방어에 성공하면 이번에는 공격으로 옮겨간다. 사실 이와 같은 맥락으로써 헤로도토스가 쓴 극작품의 처음과 마지막은 지식이 풍부한 현대 독자에게는 사정을 밝히는 일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 줄거리는 몇 사람의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차례차례 유괴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불화의 씨를 뿌리는 것은 페니키아 인으로, 헬라스인인 이오를 유괴한다. 헬라스인은 그 보복으로서 페니키아의 에우로페를 유괴한다. 다음으로 헬라스인은 콜키스의 메디아를 유괴한다. 이어서 트로이인이 그리스의 헬레네를 유괴하고, 그 보복으로 헬라스인이 트로이를 포위 공격한다. 이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이다. '여자 쪽에서 그럴 마음 이 없다면 유괴당할 리가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어쨌든 파리스는 그의 애인을 데리고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트로이인이 만일 그럴 수 있었다면 10년이나 농성을 하기보다는 그 대신 처음부터 헬레네를 넘겨주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헤로도토스의 매력 있는 특색 중 하나인 합리주의에 짓궂게 냉수를 끼얹자면 전설은 이렇게 보인다. 어쨌든 헬라스인이 트로이 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아프로디테를 대신해 아레스가 사건의 진행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일련의 부녀 유괴 사건에 대해 아무리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해도, 그리스•페니키아의 만남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포함하는 만남과 연결된 초기의 일 막으로 보고 있는 점에 대하여 헤로도토스가 깊은 통찰력을 나타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케메네스 제국 정복
우리는 이 페르시아 전역에 이르기까지의 연쇄에 관한 우리 자신의 견해를 새삼스레 말할 필요는 없으며, 앞으로 헤로도토스 이후의 시대에 이르는 공격과 반격의 연쇄를 더듬어가, 그것이 결국 어디까지 이르고 있는가를 조사해 보기로 하자.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략이 대실패로 끝난 것은 이 침략 행위가 침략자 머리 위에 내린 제1회분의 벌에 불과했다. 궁극적인 네메시스는 아케메네스 제국을 정복함으로써 형세 역전을 도모했던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의 결단이었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국의 크세르크세스가 아버지 다리우스의 유지를 이으려다 완전히 실패한 것과 대조적으로, 아버지의 정치적 유지를 이어받아 그것을 훌륭하게 실현한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새로운 극의 첫 막이 열렸다. 기원전 4세기의 알렉산드로스에 의한 아케메네스제국 타도, 그리고 기원전 3세기의 로마에 의한 카르타고 제국 타도와 함께, 헬라스 문명사회는 인접 문명에 대한 지배력을 무역 상인으로서 타르다 소스로 뻗었고, 또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의 용병이 된 6세기의 그리스 모험가들의 가장 야심적인 몽상도 미치지 못하는 광대한 범위로 확 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알렉산드로스 이후의 헬라스 사회에서 이루어진 침략의 대성공 은 마침내 오리엔트 지역에서 피해자의 반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 반동은 결국 성공을 거두었고, 알렉산드로스가 다아다넬스 해협을 건넌 지 1000년 후, 즉 7세기 초두까지 잇단 전격 작전으로 여전히 로마 제국 또는 그 후계 국가의 압박에 대한 반란과 왕국 확립에 분투하던 서고트족이 시리아에서 에스파냐에 이르기까지 지배 영역을 확장하였으나, 기원 8세기 초에 시리아 문명 세계에 속해 있던 모든 지역을 해방시킨 원시 이슬람교 아랍족 이 알렉산드로스의 사업을 일소함과 아울러 오랫동안 한쪽으로 기울었던 균형을 간신히 바로잡았다. 시리아 문명의 세계 국가가 아케메네스 및 카르타고 양제국의 옛 영토를 포함하는 아랍 칼리프국으로서 재흥됨과 동시에 이 만남의 연쇄는 종말을 고해야 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헬라스 문명의 침략으로 인해 희생된 시리아 문명사회의 복수를 이행한 아랍 인은 불법 침입한 침략자를 그 지역에서 추방하는 일만으로 만족치 않았다. 그들은 다리우스의 잘못을 되풀이하면서, 특별히 그들의 국경이 지키기 힘든 것이어서 이쪽에서 밀어내지 않으면 저쪽에서 밀고 들어올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역공세로 옮아갔다.
무법한 침략, 네메시스의 초래
아랍인은 673~77년과 717년에 두 번에 걸쳐 타우루스 산맥의 자연적 경계를 넘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공격했다. 732년에는 피레네 산맥의 자연적 경계를 넘어 프랑스로 침입하고, 다시 다음 세기에는 바다의 자연적 경계를 넘어 크레타 섬•시칠리아 섬 및 아풀리아를 정복하고 론강에서 가릴리아노강에 이르는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지중해 안에 교두보를 세웠다. 이런 무법한 침략이 마침내 네메시스를 초래하게 되었다. 8~9세기에 이슬람교도의 침략으로 잠재적 에너지에 불이 붙은 중세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의 폭발적인 반동은 십자군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당연히 예측되는 일이지만 이 십자군이 이번에는 십자군으로 인한 피해자의 반동도 야기시켰다. 살라딘을 비롯한 그 전후의 이슬람교 옹호 자는 프랑크 인 십자군 전사를 시리아에서 추방했고, 또 오스만 인은 그들을 '로마니아'로부터도 추방함으로써 그리스정교가 수행치 못했던 사업을 완수했다. 오스만 황제인 '정복자' 모하메드 2세가 해체기의 그리스정교 사회에 이슬람적 세계 국가를 제공하는 그의 필생의 사업을 수행했을 때, 다시 한번 균형이 회복된 지점에서 싸움을 중단할 기회가 찾아왔으나 그 기회도 물리치고 말았다. 8~9세기의 아랍인 이슬람교도가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기타 지역에서 이유 없이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로 침입했기 때문에 십자군이 중세 서유럽의 맹렬하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난 반공을 도발한 것과 마찬가지로, 16~17세기의 터키인 이슬람교도 역시 불필요한 침입을 계획하고 도나우강을 올라가 서유럽 사회의 본거지로 육박해 갔다. 이때 있었던 서유럽의 반동은 그때까지 없었던 독창적이면서도 놀랄 만한 형태를 취하여 이루어졌다. 오스만 제국의 신월의 양단에 의해 서유럽 그리스도 교 세계가 거의 완전히 포위당하게 되었을 때, 서유럽 인은 막다른 골목이 되어 버린 지중해에서 손실을 회복하고 그들의 에너지를 새로운 방면으로 쏟고자 대양의 정복에 나선 결과 마침내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놀라운 성공을 거둔 서유럽의 응전은 12세기 중엽을 지나온 오늘날의 관찰자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또 그에 대한 응전,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응전을 야기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이오 또는 에우로페의 유괴에서 출발하여 꽤 먼 길을 걸어왔으나 아직도 종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