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분열, 서로 대립하는 사회체의 분열. 사회체의 분열을 행동•감정•생활양식과 함께 알아보려고 한다.

사회체 분열 집단의 경험, 피상적인 관찰
이제까지 조사해 온 사회체의 분열은 집단의 경험으로써 조사해 왔으며,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이었다. 말하자면 내적•정신적인 분열을 외적이고 가시적으로 보이게 나타난 부분에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갖가지 역할을 지니고 행동하는 인간 개개인이 활동하는 장소의 공통된 기반인 사회 표면에 분열이 나타난다면, 그 밑바닥에는 반드시 인간 정신의 분열이 발견된다. 이 내면적인 분열이 취하는 갖가지 형태를 이제부터 관망해 나가기로 한다. 해체기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의 정신 분열은 갖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문명의 발생과 성장에 관여하는 인간 활동의 특징이었던 행동, 감정, 생활의 여러 가지 양식 가운데 모든 것에서 분열이 생기기 때문이다. 해체기에 들어서면 단일했던 이들 활동 방법이 각기 서로 대조적이고 성질이 상반되는 두 가지의 변형 또는 대체물로 분열하고, 도전에 대한 응전이 양자택일적인 2개의 극, 즉 한쪽은 수동적이고 또 한쪽은 능동적이거나, 아니면 어느 쪽도 창조적이 아닌 선택해야 하는 2개의 극으로 나뉜다. 능동적인 양식과 수동적인 양식 사이에서 양자택일의 선택을 함으로써 사회 해체의 비극 속의 한 역할을 떠맡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창조적인 활동의 기회를 잃은 물론 그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정신에 남겨진 유일한 자유이다. 해체의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이 양자택일적 선택은 그 제한이 더한층 엄격해지게 되고 그 차이가 더욱 심해지게 되면, 그 결과 또한 더욱 증대하게 된다. 영혼의 분열이라는 정신적 경험은 이렇듯 동적인 운동이지 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첫 번째로, 창조력 행사를 위해 양자택일의 인간이 취하는 두 가지 개인적 행동 양식을 들 수 있는데, 둘 다 자기표현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수동적인 시도는 방종, 즉 '아크라티아'(그리스 어로, 자기를 누르는 힘이 없는 것)이다. 방종 속에서 정신은 '자기 멋대로 놀도록' 한다. 우리들의 정신은, 자기의 자연적인 욕망이나 혐오를 억제하지 않는 것이 '자연을 따라 생존하는' 까닭이라고 믿고, 또한 그렇게 하면 잃어버린 귀중한 창조성의 재능을 저 신비스러운 여신(자연)에게서 자동적으로 다시 돌려받는다고 믿고 '자기를 떼어놓는다'. 한편 양자택일의 능동적인 선택은 자제, 즉 '엔크라티아'(그리스어로, 자기를 제어하는 것)의 노력이다. 이 경우 정신은 전자와는 반대로 자연은 창조성의 원천이 아니라 창조성을 손상하는 해독이며,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상실된 창조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서 '자기를 통제하여' '자연의 감정'을 훈련하려고 한다.
사회가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지름길, 창조적 인격
다음으로는 위험하기는 하지만, 사회가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지름길이었던 창조적 인격에 대한 모방의 양자 택일적 사회적 행동의 두 길을 들 수 있다. 이 모방을 대신하는 두 길은 '사회적 훈련'이 이미 효과가 없어진 부대의 대열에서 이탈하려고 시도한다. 이 사회적 정체 상태를 타개하려는 수동적인 시도는 낙오라는 형태를 취한다. 병사는 부대가 그때까지 그의 사기를 지탱해 준 규율을 상실한 것을 알고 당황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 아래서는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멋대로 결정해 버린다. 이와 같이 좋지 않은 소견으로 낙오자는 궁지에 빠진 전우를 죽게 내버려 두고 자기만 살려는 헛된 희망을 지니고 전열을 벗어나 후퇴한다. 그런데 같은 시련에 직면하는 또 하나의 다른 태도가 있는데, 그것을 순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순교자라는 것은 요컨대 자발적으로 전열을 벗어나 서 앞으로 나아가 요구된 의무를 넘어선 행동을 하려고 하는 병사를 말한다. 보통의 경우 병사에게 요구되는 의무는 상사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도에서 자기의 목숨을 거는 것뿐이지만, 순교자는 그것과는 달리 어떤 이상(포)을 옹호하기 위하여 자진하여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행동에서 감정으로 눈을 옮기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성장의 본질이 나타나는 저 '엘랑'(비약)의 운동과 그 반대 현상에 대한 양자택일적인 반응으로서, 개인적 감정의 두 가지 양식이다. 이 두 감정은 모두 지배권을 수립하 고 공세로 바뀐다. 그리고 마침내 우세를 확립한 악의 세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라고 하는 비통한 자각을 초래한다. 잇달아 일어나면서 점점 심해져 가는 이런 정신적 패배감이 수동적으로 나타나면 표류의식이 된다. 패배하는 그의 영혼은 환경을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을 알고 매우 의기가 저하된다. 그리고 정신 자체를 포함하여 우주는 아무래도 쳐부술 수 없는 동시에 비합리 적인 두 힘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사악한 여신이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믿는다. 이 여신은 '류케'(그리스어로, 우연 및 그 의인화)라는 이름 아래 비위가 맞추어지고, 또한 '아난케'(필연 및 그 의인화)라는 이름 아래 참고 견디는 신-토마스 하디의 극시〈다이나스츠〉의 코러스 부분 속에 문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한 쌍의 신들이다. 한편 이와 반대로 패주 하는 영혼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몰아넣으며 정신적으로 패배하는 것은, 영혼이 자기를 지배하고 제어하는 힘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표류 의식 대신에 죄의식이 나타난다. 우리는 또 양식(*※) 의식(고유한 문화 양식에 대한 자각) 성장을 통한 문명의 분화라는 객관적 과정에 대응하는 주관적 측면을 대체하는 양자택일적인 두 종류의 주관적•사회적 감정에 주목하게 된다. 이 두 가지 감정 이 어떤 같은 도전에 대해 응전하는 방법은 전혀 다르지만, 이 모두가 어떤 양식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점에서는 같다. 수동적인 반응은 혼합 의식으로서, 정신은 모든 것을 용해하는 도가니 속에 자신을 맡긴다. 언어나 문학, 그림 따위의 표현 수단에서 이 혼합 의식은 혼합어 (링구아 프랑카' 또는 '코이네의 보급 형태로, 그리고 혼성적인 표준화된 문학• 그 림•조각•건축 양식의 보급 형태로 나타나며, 철학과 종교의 영역에서는 신 크레티즘 (혼합주의)을 낳는다. 또한 문화 양식 의식에서 능동적인 반응은, 지방적•일시적 생활양식이 상실된 것을 보편적•영구적인 성질을 띤 다른 양식, 즉 '곳곳에서 언제나 모 든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 것'(성 윈켄티우스의 말)을 채용해야 할 좋은 기회이며 호소라고 간주한다.
통일 의식의 각성, 시야의 확대
이 능동적인 응전은 통일 의식의 각성이므로 그것은 시야가 확대되고, 인류의 통일에서 우주의 통일을 거쳐 신의 유일성을 포용하게 됨에 따라 점점 넓어지고 또 깊어져간다. 해체기에 나타나는 분열 현상의 세 번째로서 생활면으로 옮겨가면 여기서도 역시 선택적인 두 쌍의 반응에 마주치지만,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제까지의 형식이나 모양과 다른 점이 세 가지 있다. 첫째로 이 경우에 성장기의 특 색인 단일 운동을 대신하는 양자 택일적 반응은 성장기 운동의 대체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변형이다. 둘째로 두 쌍의 양자택일적인 반응은 둘 다 같은 단일 운동 즉, 앞서 우리가 활동의 장인 마이크로코스모스 (내면적 소우주)로부터 매크로코스모스(외면적 대우주)로의 전환이라 부른 운동의 변형이다. 셋째로 2조는 서로 이렇게 나뉠 만큼의 충분한 이유가 되는 커다란 차이에 의해 구별된다. 즉 한쪽 조에서는 반응의 성질이 폭력적이고 다른 조에서는 온건적이다. 폭력적인 조의 수동적인 반응은 복고주의라고 할 수 있고, 능동적 반응은 미래주의라고 할 수 있다. 온건적인 조의 수동적 반응은 초탈, 능동적 반응은 변모라 부를 수 있다. 복고주의와 미래주의는 성장기의 특유한 운동 활동의 하나인 정신으로부터 다른 정신으로의 전이를 단순한 시간 차원의 전이로 대체하려는 양자 택 일적인 시도이다. 양자는 모두 매크로코스모스 대신 소우주 속에 살려는 노력을 포기한다. 그리고 정신적 풍토의 격렬한 변화에 직면하거나 도전하지도 않고 도달할 수 있는 유토피아를 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