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있어서의 저속과 관습, 예술이라는 특수 영역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풍속과 관습이라는 일반적인 영역에서의 예술
풍속과 관습이라는 일반적인 영역에서 예술이라는 특수 영역으로 넘어가면, 여기서도 또한 혼효 의식이 저속과 야만의 양자택일이라는 형태를 취하여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체기 문명의 예술은 이상하게 광범한 지역으로 급속히 퍼져갔던 결과로, 뛰어난 양식의 독자성을 잃음으로써 이 두가 지 중 어느 한쪽의 형태에서 저속의 두 가지 전형적인 예는 해체기의 미노스 문명과 해체기의 시리아 문명의 예술 양식이다. 미노스 해양 왕국 멸망 뒤의 공백 시대(기원전 1425~125년 무렵)는, 보다 뛰어났던 그 이전의 미 노스 양식 가운데 어느 것보다도 넓은 범위에 걸쳐 유포되었던 '후기 미노스 제3기'라 불리는 시기의 비속한 양식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시리아 문명이 쇠퇴한 뒤의 동란 시대(기원전 925~525년 무렵) 역시 마찬가지로 비속하고도 넓게 유포되었던 페니키아 예술의 잡다한 목적에 의해 기계적으로 조립된 형태를 특색으로 하고 있다. 헬라스 문명의 예술사에서 이에 상당하는 비속함은 화려한 코린트 양식의 건축 (어느 한도를 넘는 것을 몹시 꺼리는 그리스 정신과는 정반대인)과 함께 유행했던 복잡다단한 장식 속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로마 제국 밑에서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던 이 양식의 뚜렷한 실례를 찾는다면, 그것은 헬라스 세계의 중심부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바알바크 (다마스쿠스 북쪽에 있었던 로마의 식민지. 그리스어로는 '페리오폴리스')의 비 헬라스적인 신을 모시는 신전의 유적이나 이란 고원 동쪽 끝에 헬레니즘에 심취했던 야만족 무장들 의 유해 안치를 위하여 헬라스 사회의 묘석 제작자가 만든 석관 속에서 발견된다. 헬라스 사회의 해체를 나타내는 이들 고고학적 자료에서 문헌 자료로 눈을 돌리면, 기원전 431년의 쇠퇴 직후 몇 세대의 지식인들이 그리스 음악의 저속화를 개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또 '디오니소스 좌'(연합 무대 예술의 협회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의 손에 의하여 아티카의 연극이 비속화했던 일은 이미 다른 문제와의 연관에서 진술했던 대로이다.
바로크 및 로코코라는 서유럽의 헬라프풍 양식
근대 서유럽 세계에 있어, 17, 18세기의 자유로운 바로크 및 로코코라는 서유럽의 헬라스풍 양식이 태어나는 자극이 되었던 것은 헬라스 예술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퇴폐적 양식이었던 엄격한 고전 양식은 아니었으며, 또한 서유럽 빅토리아 왕조 시대 상업 예술의 이른바 '초콜릿 상자' 양식은 바로 '후기 미노스 제3기' 양식과 비슷한 것이었는데, 이는 오늘날의 서유럽 사회의 독특한 기술적 시 각을 통한 상품을 광고에 봉사하면서 지구의 전표면을 정복하는 기세를 보이고 있다. '초콜릿 상자' 양식의 바보스러움에 몹시 싫증난 현대의 서유럽 예술가들 은 어떡하든 사태를 개선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저속함에서 라파엘 이전의 비잔틴풍으로 돌아가려는 복고적인 도피에 대해서는 뒤의 장에서 논하기로 하고, 지금 여기서는 그것과 동시에 행해지고 있는 또 하나의 도피, 즉 저속에서 야만으로의 도피에 주목해 보자. 비잔틴 양식 속에서 자 기의 취미에 맞는 도피처를 찾아내지 못한 현대의 자존심 강한 서유럽 조각 가들은 그들의 눈을 베닌 (서아프리카 난이란아난 왕국 두루도다)으로 돌렸다 {. 그리고 나눈 히 창조력의 샘이 고갈된 서유럽 세계가 서아프리카의 야만족에게서 새로운 감흥을 얻으려는 것은 조각 분야만이 아니다. 서아프리카의 조각과 병행하 여 서아프리카의 음악과 무용이 아메리카를 경유하여 유럽의 중심부에 수입된 것이다. 비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베닌이나 비잔티움으로 도피해 본들 도저히 현 대 서유럽 예술가들은 그 잃어버린 혼을 되찾을 가망이 없는 것 같다. 마치 본디 서유럽 인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 인처럼 말이 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그들 자신을 구할 수는 없을지라도 어쩌면 타인을 구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될는지 모른다. 베르그송은 이렇게 말했다. "평범한 교사는 천재에 의하여 창조된 학문을 기계적으로 가르치는 데 지 나지 않지만, 그의 학생 가운데 누군가에게 그 자신이 지금까지 느껴 본 일 이 없는 사명의 자각을 일깨울지도 모른다." 해체기 헬라스 세계의 '상업 예술'이 인도에서 계속 해체되고 있는 또 하 나의 세계 종교적 경험과 마주쳐 매우 새롭고 창조적인 대승 불교 예술을 불러일으키는 경탄할 만한 위업을 완수했더라면, 우리는 근대 서유럽의 '초콜릿 상자' 양식이 온 세계 곳곳에서 광고용 게시판이며 옥상 광고 위에 큼직 하니 자랑스럽게 게시되고 있는 동안 똑같은 기적을 낳았을 힘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혼합어 언어 영역에서는 혼효 의식이 언어의 지방적 특수성을 잃고 일반적 혼합 성의 형태로 나타난다. 언어 제도는 인간 상호 간의 의사소통 수단으로써 존재하는 것인데, 이제까지의 인류 역사에 있어서 그 사회적 효과는 전체적으로 보아 인류를 결합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분열시킨 실정이었다. 그것은 언어가 실제로 천차만별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는 언어조차도 아직 극히 일부분에서 인류의 공유물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또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이국인'으로 표시되기 때문이다.
해체기 문명, 경쟁 상대의 영토 병탄
몰락 과정이 상당히 진전된 해체기 문명에서 서로 상대를 멸망시키는 싸움을 하고 승리를 얻은 언어는 그것을 모국어로서 사용하는 인간의 운명에 따라 패배한 경쟁 상대의 영토를 병탄 하여 광대한 지역을 점유하게 된다. 조금이라도 역사적 사실에 연결되어 있다면, 아마도 수메르 사회의 세계 국가가 분열하고 있던 시대의 바빌로니아일 것이다. 왜냐하면 수메르 사회 역사의 파국적인 최후 시기에 수메르 어는 수메르 문화를 전파하는 본디 언어적 수단으로써의 역사적 역할을 완수하고 난 뒤 사어(Stm)가 되었으며, 한편 수 메르어와 대등한 지위로 밀고 올라간 아카드어조차, 유기된 영토 안으로 야만족 전투 단체가 가지고 들어온 외적 프롤레타리아의 수많은 토속어와 다툼을 벌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언어 혼란의 전설은 이렇게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가 최대의 장해로 간주되고 있는 점에서 진실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전례 없는 사회적 위기를 앞두고 사회적 행동을 통일하는 데 언어 혼란이 최대한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의 혼란과 사회적 마비와의 관련은 위에 확실히 기록되어 있는 역사상의 몇 가지 현저한 예로써 입증할 수 있다. 현대 서유럽 사회에서는 이러한 언어의 다양성이, 1914~ 18년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멸망한 도나우 합스부르크 왕국의 치명적인 약점의 하나였다. 또한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유능함을 발휘했던 오스만 파디샤의 노예 세대조차도, 이 제도가 성숙기에 이르렀던 1651년에 바벨의 저주가 투르크 궁전 안에서 술탄의 근신들 위에 내려져 궁정 혁명의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을 완전히 무능한 상태로 빠뜨렸던 사실이 인정된다. 소년들은 매우 흥분한 나머지 그들이 인위적으로 배워 익힌 오스만 어를 잊어버렸다. "놀라 이상하게 여기는 목격자의 귀를 울린 음향은 가지가지 소리와 언어의 떠들썩함이었다. 어떤 자는 그루지야어, 어떤 자는 알바니아 어•보스니아 어•민그렐 어•투르크어 이탈리아 어 등등 제각기 편리한 말로 소리쳤다. 15 오스만의 역사에 일어난 이 사건을 〈사도행전〉 제2장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 강림'이 라는 저 중대한 사건에 비하면 매우 사소한 일이다. 성서의 이 장면에서 나오는 말은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는 미지의 여러 가지 언어, 즉 그때까지 자기 나라말인 아람어 이외의 언어를 한 번도 말한 적이 없고 들은 적도 배운 적도 없는 갈릴리인으로서는 생소한 미지의 여러 언어였다. 그들이 돌연 그러한 방언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신이 내린 기적적인 능력 때문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수수께끼의 한 구절은 이제까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지만, 지금 여기서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점에 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