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주의의 자기 초월. 정치 분야에서의 미래주의 자기 초월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정치 분야에서 미래주의적 방책
정치 분야에서 미래주의적 방책이 때마침 성공을 거두는 일이 있는데 반해, 생활 태도로서의 미래주의는 그 길을 더듬으려고 하는 인간에게 처음부터 달성치 못할 것으로 정해져 있는 목표를 헛되이 추구케 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가령 그 탐구가 헛된 것이고 비극적인 결과로 끝난다고 해도 반드시 전혀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좌절하고 있는 탐구자를 평화의 길로 끌어들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순전한 미래주의는 궁여지책으로, 그것도 할 수 없이 채용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현재는 절망하고 있으되 아직 현세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않은 영혼이 최초에 의지하는 수단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 속으로 도피를 시도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복고주의적 도피를 실제로 시도해 보고 헛수고로 끝났거나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로 단념한 뒤에 비로소 그 영혼은 용기를 내어 보다 부자연한 미래주의 방향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순수한 미래주의의 성질은 몇 개의 전형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가장 좋다. 가령 헬라스 세계에서 기원전 2세기에 계속되는 전쟁과 동요로 몇천 몇만이라는 다수의 시리아인과 기타 교양 있는 오리엔트인이 자유를 박탈당하고 고향을 쫓겨나 유랑길에 오르고 가족과 헤어져서 바다 건너 시칠리아 섬이나 이탈리아 반도로 끌려가 한니발 전쟁 때문에 황폐한 지역의 농원이나 목장에서 노예로 혹사하는 몸이 되었다. 고국에서 쫓겨나 현재에서 도피하는 길을 절실히 구하고 있던 이들 노예들에게 복고적인 과거로 되돌아갈 가능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고국에 돌아가는 일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때까지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던 고국의 모든 것이 이미 되찾을 가능성 없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되돌아갈 수 없었던 그들은 다만 앞으로 전진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압제에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마침내 그들은 실력으로 반항했다. 수차례에 걸친 대규모적인 노예 폭동의 필사적인 목적은 현재의 노예가 주인이 되고 주인을 노예로 하여, 이를테면 뒤바뀐 로마 공화정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보다 앞선 시리아 사회의 역사에서도 자기네 유대 왕국이 멸망함으로써 비운을 만난 유대인이 같은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디아스포라는 독립된 지방 국가
신바빌로니아 제국과 아케메네스 제국에 병탄 되어 국외로 흩어져 이방인 사이에서 생활하게 된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독립된 지방 국가였던 유형 이전의 상태로 복귀할 수 있다는 확실한 희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미 되찾을 수 없는 지난 옛 상태를 목표로 삼고 거기에 희망을 걸 수는 없었다. 더구나 아무래도 참을 수 없는 현재에서 언젠가는 탈출할 수 있다는 강한 희망을 지니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기에, 본래의 국가 유형 이후 이제 대제국 페르시아가 지배하는 세계에 포로로 와 있는 유대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대의 과거 정치사상 선례가 없는 유일한 형태의 다윗 왕국이 장차 건설될 날을 고대하게 되었다. 새로운 다윗이 출현하여 그 지배하에 전 유대 민족이 재차 결집한다면 그들은 현재 왕권을 쥐고 있는 자의 손에서 왕권을 빼앗아 내일의 예루살렘을 오늘날의 바빌론이나 수사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 것이다. 제루바벨 (유대 9를 보며) 이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 왕처럼, 마카베오의 유다가 안티오코스처럼, 또 바르코카바가 하드리아누스 대제처럼 세계를 지배할 가능성이 없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꿈은 또한 전부터 러시아 '구신자((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일이 있다. 이들 '라스코니키'파(현시 안 자회에서)의 눈으로 보면 표트르 대제가 개혁한 정교는 전혀 정교와는 비슷하지도 않은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래된 교회의 질서가 악마적인 동시에 전능의 힘을 지니고 있는 세속 질서에 반항하여 물리친 다음 부활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거기서 라스콜니키는 아직까지 선례가 없었던 일, 즉 순수한 정교 신앙을 부흥하는 의지와 능력을 겸비한 황제, 즉 메시아의 출현에 희망을 걸게 되었다. 이런 순수한 미래주의의 예에서 공통되는 중요한 특징은 미래주의자가 도피처를 구한 희망이 모두 평범한 현세적 방법에 의해 실제적으로 완전히 실현된다고 생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특징은 풍부한 사료를 남기고 있는 유대인의 미래주의에서 특히 눈에 띈다.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카 드네자르에게 자기들의 왕국을 멸망당한 이래 유대인은 전반적 정치 정세가 조금이라도 유리한 방향으로 향하게 되면 몇 번이고 새로운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일에 희망을 걸었다. 캄비세스 (제8)의 죽음에서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다리우스가 대두되기까지의 사이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이 통과한 단기간의 무정부 시대에 제룹바벨이 다윗 왕국 재건을 시도 (기원전 522년 경)했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 셀레우코스가 세운 시리아왕국이 기원전 83년에 약 2세기 반 만에 몰락한 이래 로마 군단이 다시 레반트 지역에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의 비교적 장기간의 공백 기간을 유대인은 마카베오 왕가의 승리 덕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팔레스티나의 유대인 대다수는 경솔하게도 이 현세적 성공의 신기루에 기뻐 날뛰었고, 그 결과 400년 전에 '제2 이사야'가 한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나라의 창설자는 이미 오랫동안 신성시되어 온 다윗의 후예여야 된다는 전설을 내동댕이쳐 버렸다.
로마의 아랑, 팔레스티나의 지배자
유대인을 탄압한 전성기의 강대한 로마의 힘을 뒤로 차치하고 어떻게 유대인이 노쇠한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해서 반항할 수 있었겠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유대의 이두메아 출생 독재자 헤롯 왕에게는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는 자기가 로마의 아랑에 의해 팔레스티나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버린 일이 없다. 그리고 그가 통치한 전기 간을 통해 그의 국민 이 경솔한 행동으로 곤란을 겪지 않도록 마음을 썼다. 그런데 유대인은 그처럼 유익한 정치적 교훈을 가르쳐준 헤롯에게 감사를 하기는커녕 아무리 헤 롯의 생각이 올바르다고 해도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을 교묘하게 제 지하고 있던 헤롯의 손이 제거되자마자 그들은 반항하기 시작하여 미래주의의 길을 피할 수 없는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더구나 단 한번 로마의 실력을 보는 것만으로는 단념하지 않았다. 66~70년의 무서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은 여전히 지치지 않고 재차 115~117년에, 그리고 다시 132~135년에 스스로 재난을 불러들여 심한 곤욕을 당했다. 기원 132~135년의 바르 코카바는 기원전 522년의 제룹바벨과 똑같은 수단으로 똑같은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것이다. 유대인이 이런 종류의 미래주의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을 깨닫기까지는 60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다. 만일 이것으로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가 완전히 끝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다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지도 못한다. 물론 지금까지 말해 온 것은 이야기의 절반, 특히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일부 유대인이 부르봉 왕조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배운 것도 없고, 아무것도 잊은 것도 없었다'는 데 반하여 다른 유대인은 쓰디쓴 경험에 비추어 차차 다른 곳에 희 망을 두게 되었다. 미래주의의 파탄을 발견해 가는 과정에서 유대인은 하느님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또 하나의 중대한 발견을 하였다. 그리고 한편은 소극적이고, 다른 한편은 적극적인 이 두 가지 부류의 유대인들이 걸은 길을 병행하여 세기를 좇아감에 따라 서서히 명백해졌다. 대망의 새로운 현세적 유대 왕국을 건설하는 유대인은 그 임무에 알맞게 피와 살을 갖춘 헌신적 왕이며, 세습적인 왕조를 창립한다는 식으로 멋대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마침 이 제국 건설자의 출현이 예언되고, 또 제룹바벨에서 시작하여 바르 코카바에 이르는 동안 차례차례 나타난 이 역할의 자청자를 환호로써 맞아들였을 때 사용된 칭호는 '멜레크'(왕)가 아니라, '메시아' (주로부터 기름 세례를 받은 자)였다. 이처럼 뒤편의 희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유대인의 신은 끊임없이 유대인의 희망과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