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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기의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

by 공부하는 샤샤 2026. 6. 20.

해체기의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 해체기의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를 구조주의와 관련하여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해체기의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
해체기의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

구세주로서의 창조적 천재 문명과 개인과의 관계

구세주로서의 창조적 천재 문명과 개인과의 관계라는 문제는 이미 앞서 이 '연구'에서 고찰한 바 있거니와, 우리가 사회라 부르는 제도는 일정수의 각 개인의 활동 분야의 공통된 기초를 말하는 것이다. 활동의 원천이 사회 자체라는 것은 결코 아니고, 사회란 언제나 개인이라는 것이다. 창조 행위가 되는 활동은 언제나 어떠한 의미에서 초인간적이지만 천재도 역시 동료에 대한 작용으로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 어떠한 사회에서도 창조적 인격의 수는 언제나 소수라는 것, 그리고 범속한 인간에 대한 천재의 작용은 때로는 직접적 계몽이라는 더할 나위 없는 방법으로 행해지는 적이 있지만 보통은 비창조적인 일반 민중의 영혼 속에 미메시스(모방)의 능력을 일깨움으로써 민중의 자발적 활동에 맡겨 두었다가는 도저히 완수하지 못하는 진화를 '기계적'으로 완수시키는, 일종의 사회적 훈련이라는 차선책으로 행해진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결론은 성장에 대한 분석 과정에서 도달한 결론인데, 또 분명 일반적으로 사회 역사의 모든 단계에 있어서 개인과 사회의 상호 작용에도 해당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고찰하는 사회가 쇠퇴하고 해체 과정을 걸을 때 이들 상호 작용에 어떠한 세부적 차이가 인정되는 것일까? 문명의 성장기에 나온 창조적 개인들을 배출하던 창조적 소수자는 이미 창조력을 상실하고, 단순한 '지배적 소수자'로 타락해 버렸다. 그러나 해체의 본질적인 특징인 프롤레타리아가 떠나는 현상 자체는 민중을 압박하는 비창조적인 '당국자'에 대한 반대 운동을 조직하는 것 일뿐 아니라, 이미 활동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은 창조적 인격의 지도 아래 이루어졌던 것이다.

 

창조적 개인의 출현, 조력에 의하여 지도자가 되는 사회

그러므로 성장으로부터 해체로의 변화와 함께 창조의 불씨가 죄다 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창조적 개인이 출현하고 그 창조력에 의하여 지도자가 되는 것이 지만, 다만 그들은 이제 새로운 입장에 서고 그 입장에서 그들의 창조 활동을 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성장기의 문명에 있어서는 창조자가 도전에 대하여 승리의 응전으로써 답하는 정복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요구되지만, 해체기의 문명에 있어서는 도전이 이미 창조성을 잃은 소수자를 쳐부수었기 때문에 응전할 수 없었던 사회를 구제하는 구세주의 역할을 수행토록 요구된다. 이런 구세주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들이 사회적 질환에 어떤 치료법을 적 용하려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디까지나 현재에 희망을 잃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사회의 방향을 바로잡아 새로운 진보의 길로 바꾸려고 결사대를 지휘하여 해체해 가는 사회를 구하려는 구세주가 있다. 이들 구세주는 지배적 소수자에 속하는 사람들이며, 그 공통된 특징은 결국 구제에 실패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그 밖에도 이미 앞서 살펴본 4개의 가능한 탈출로 가운데 어느 하나에 도달함으로써 구제를 실현하려고 하는, 해체해 가는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간 구세주들이 있다. 이 뒤의 4개의 다른 유파에 속하는 구세주들은 모두 현재의 사태를 구출해 보려는 생각을 내버린 점에서 일치한다. 복고주의 적인 구세주는 공상적인 과거를 부흥하려고 들며, 미래주의적인 구세주는 상상으로 그린 미래 속으로 뛰어들려고 한다. 초탈에의 길을 향하는 구세주는 왕의 가면을 쓴 철학자로서 모습을 나타내고, 변모에의 길을 가리키는 구세주는 인간으로 변신한 신으로서 나타난다.

 

칼을 가진 구세주, 해체하는 사회의 자칭 구세주

칼을 가진 구세주 해체하는 사회의 자칭 구세주는 반드시 칼을 가진 구세주인데, 그 칼은 빼어져 있는 때도 있고 칼집에 들어 있을 때도 있다. 그는 칼을 휘둘러 모두 쳐서 쓰러뜨리든가,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둘 때까지' 승리자로서 칼을 칼집에 넣고 위세를 떨치고 앉아 있든가의 어느 하나이다. 그는 헤라클레스일 수도 있고 제우스일 수도 있으며, 다윗이나 솔로몬일 수도 있다. 일생 동안 쉬는 일도 없이 계속 노력하여 일하며 죽어가는 다윗이나, 헤라클레스 쪽이 영화를 누리는 솔로몬이나 위풍당당한 제우스 쪽보다도 낭만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헤라클레스의 노고도, 다윗의 싸움도, 제우스의 온정도 솔로몬처럼 번영을 쟁취하는 일이 목적이 아니라면, 이렇다 할 기대도 걸 수 없는 헛수고로 끝나고 만다. 칼을 휘두르는 것은 그것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결국 칼을 사용치 않아도 되게 할 수 있다 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희망은 덧없는 몽상이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그런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왕국을 선언한 구세주의 말 은 19세기의 서유럽 정치가 가운데 가장 시니컬한 현실주의자 중의 한 사람 (탈레랑)이 자기 행위를 후퇴하며 이런 복음에 동의를 하고 있다. 그는 복음서의 말을 그가 살아 있던 시대와 장소에 알맞은 표현으로 대치하여 '총검을 갖고서도 도저히 안 되는 일은 총검 위에 안 좌하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인간이 진심으로 폭력을 후회하면서 언제까지나 폭력의 도 움을 빈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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