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가면을 쓴 철학자. 다른 도움을 받지 않는 왕의 가면을 쓴 철학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초탈의 길을 설파한 가장 위대한 철학자
'타임머신'의 도움도 받지 않고, 또 칼의 도움도 받지 않은 한 가지 구제 방법을, 헬라스 사회의 동란 시대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헬라스 사회에서 가장 빨리 초탈의 길을 설파한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제안하고 있다. "헬라스의 모든 국가의 재난을 끝나게 하기 위해서는(또 인류의 재난을 제거하는 방법도 나의 의련으로는 마찬가지) 한 사람의 인간 속에 정치권력과 철학과의 통일을 실현하고, 현재 이 두 가지 일 중 어느 한쪽에만 종사하고 있는 범용 한 인간을 강제적으로 실격자로 할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이 통일은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한쪽에 의해 달성할 수 있다. 철학자 가 우리 국가의 왕이 되든가, 아니면 현왕 및 주권자로 불리고 있는 사람들 이 철학을 정말 철저하게 바로잡든가 하여야만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구제 방법을 제안함에 있어 플라톤은 앞질러 보통 사람의 비평의 화살을 피할 궁리를 하고 있다. 그는 그의 제안을 비철학적인 인간의 조소를 도발할 것 같은 패러독스의 형태로 들고 나왔다. 그러나 만일 플라톤의 처방이 문외한(그것이 왕이건 일반 민중이건)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말이라면 철학자에겐 더욱더 힘든 일이다. 철학의 본래 목적은 인생으로부터의 초탈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개인의 초탈을 구하는 일과 사회의 구제를 구하는 일과는 양립하지 않는 것이며, 서로 배제하는 바가 다른 것이 아닌가? 어떻게 정당하게도 탈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파멸의 도시'를 구제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희생의 화신(즉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이라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 신념을 공공연하게 표명할 만한 용기를 가진 철학자는 드물었고, 더욱이 이 신념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용기를 가진 철학자는 더 적었다. 왜냐하면 초탈의 길을 걷는 달인은 보편적인 인간적 감정을 지닌 인간으로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마음을 기준으로 하여 추측할 수 있는 이웃 사람의 괴로움을 무시하거나 자기의 구제 방법은 자기 체험을 통해 발견한 것이니, 타인에게 그것을 가르쳐 줘도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 철학자는 이웃 사람에게 구제의 손길을 뻗침으로써 우리 몸에 부담이 되게 해야 하는 가? 이 도덕적 딜레마를 앞에 놓고, 연민이나 사랑은 악덕이라는 인도 사회의 가르침이나 '행동은 명상의 약해진 형태'라는 플로티노스의 가르침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도 헛수고이다. 또 플루타르크가, 크리시포스(카리슬학식)가 논문 속 문장에서 인도철학이나 플로티노스적 철학을 권하고 있는 원문을 인용하여 스토아파 사부들의 지적 도덕적 자가당착을 심하게 공격하고 있으나, 우리의 이웃 철학자는 그러한 자가당착에 대한 비난을 달갑게 받아들이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초탈의 길, 무술의 비결을 완비한 달인
플라톤 자신이 명하는 바에 의하면, 초탈의 길인 학문이나 무술의 비결을 완비한 달인은 고생하여 겨우 나간, 햇빛이 밝게 빛나는 장소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정에 있어서는 참기 어려운 일이지만 플라톤은 그의 철학 자들에게 여전히 '불행과 쇠사슬에 묶이어' 앉아 있는 불행하고 무지한 동포를 구원하기 위해 재차 '동굴' 속으로 내려가도록 명했다. 그리고 이 플라톤의 명령이 에피쿠로스에 의해 충실히 지켜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어떤 일에나 혼란되지 않는 부동의 경지를 이상으로 삼은 이 헬라스 사회의 에피쿠로스 철학자는 나사렛 예수 이전에 구세주를 뜻하는 그리스 어의 '소테르'라는 칭호를 획득한 단 한 사람의 개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영예는 보통 군주의 독점물이며, 정치적 •군사적 공적에 대한 보상이었다. 에피크로스의 선례 없는 영예는 이 냉정한 철학자가 대항할 수 없는 내심의 외침에 기꺼이 따른 데서 온 결과였다. 그리고 그 에피크로스의 구제 활동을 찬양하고 있는 루크 레티우스시의 감사와 찬미의 열렬함을 보더라도 적어도 이 경우 이 칭호는 공손한 한 편의 의례가 아니라, 직접 생전의 그를 알고 그를 존경한 에피크로스의 동시대로부터 시작되고 전승되어 그 라틴 시인에게 전해진 깊고 강렬 한 감정의 표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에피크로스의 역설적인 생애는 철학자가 플라톤의 처방대로 무지한 동포들을 구하려고 왕이 되는 길을 택했을 경우 자기 어깨 위에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 얼마나 괴롭고 고된 것인가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플라톤이 나타낸 또 하나의 길, 즉 왕을 철학자로 하는 길이 플라톤 자신을 비롯한 사회적 양심을 가진 모든 철학자에게 극히 매력 있는 것이 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플라톤은 그 생애 중 적어도 세 번, 마음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하여간 자발적으로 아티카의 본거지에서 나와 바다를 건너 시라쿠스로 가 시칠리아의 독재자에게 군주의 임무에 대한 아테네 철학자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했다. 그 결과는 헬라스 사회의 역사에서 이상하고 애석하게도 완전히 중요함이 결여된 한 구절을 이루고 있다.
역사상 저명한 군주로서 정도의 차이
역사상 저명한 군주로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여가를 열심히 철학자의 의견을 듣는 일에 소비한 사람은 한두 사람에 그친다. 서유럽의 역사가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예는 18세기 서유럽 세계의 소위 '계몽 전제 군주'인데, 이들 군주는 볼테르를 필두로 하여 여러 인간을 포함하는 프랑스의 '필로조프(철학자)'들을 어떤 때는 총애하고 어떤 때는 그들과 싸우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러나 우리는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를 만족한 구세주로 볼 수는 없다. 이 밖에도 몇 세대 전에 세상을 떠난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진정한 철학을 채득 한, 주목할 만한 지배자의 예가 몇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학문은 그의 사부 루스티쿠스와 섹스투스의 덕택이라고 하나, 마르쿠스의 이런 언명이 없었으면 무명의 인간이었을 이 두 스승은 과거의 뛰어난 스토아파 학자, 그중에서도 특히 마르쿠스 시대부터 헤아려 300년 전인 기원전 2세기에 살았던 파나이티우스의 철학을 전하는 매개자에 불과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도사회의 아소카 왕도 그의 즉위 20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불타의 제자였다. 아소카 시대의 인도 세계와 마르쿠스 시대의 헬라스 세계의 상태는, 플라톤의 사회생활은 가장 지배자가 되기 싫어하 는 인간이 지배자가 될 때 가장 행복하며, 또 가장 잘 조화가 유지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공업은 그들의 죽음과 함께 없어져 버렸다. 마르쿠스 자신은 마르쿠스의 전임자들 이 그럭저럭 100년 동안 충실히 지켜서 언제나 성공을 거두어 온 헌법상의 양자세습 관습을 어기고 친자식을 후계자로 택하였기 때문에 그의 모처럼의 철학적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아소카 왕도 그 자신은 실로 훌륭한 성은 명백히 예상되며, 또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