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변신한 신. 창조적 천재가 나타나는 방법과 관련하여 인간으로 변신한 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창조적 천재의 해체기, 사회 해체의 도전
우리는 창조적 천재가 해체기 사회에 태어나 그 재능과 정력을 사회 해체의 도전과 겨루는 일에 기울이는 창조적 천재가 나타나는 3가지 다른 방법을 검토하여,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구제를 초래할 방법이 직접 또는 궁극의 재액을 초래하는데 불과함을 알았다. 지금까지 취급해 온 구세주가 모두 실패한 사실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떤 결론을 얻게 되는가? 이런 사실은 해체기 사회에 구제를 초래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구세주를 뜻하는 자가 보통 인간에 불과하다면, 반드시 파멸로 끝날 운명을 뜻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경험적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임을 증명해 온 그 고전적인 말(언어)의 문맥을 상기해 보자.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은 제자 한 사람 칼을 빼들고 내리쳤을 때, 그에게 방금 뽑아 사용한 칼을 칼집에 넣기를 명하는 이유로서 구세주가 한 말이다. 나사렛의 예수는 우선 베드로의 칼이 낸 상처를 치료하고 그 뒤에 가장 극단적인 모욕과 고통을 받기 위해 스스로 자기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나아가 그가 칼을 뽑기를 거부하는 동기는 이 상황에선 도저히 적의 힘을 당해 내지 못한다는 실제적인 타산은 아니다. 나중에 재판관을 향해 말했듯이 그는, 만일 칼을 뽑는다면 12군단의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칼을 휘두르는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어떠한 승리도 반드시 차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렇게 믿으면서도 더욱 그는 무기 사용을 거부한다. 칼로 정복하기보다도 오히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기를 원한 다 위기에 처한 순간에 이상과 같은 길을 택한 예수는, 지금까지 연구해 온 다른 자칭 구세주가 취한 전통적 행동 방향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무엇이 나사렛 태생의 구세주에게 영감을 주어 이런 중대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또 하나의 물음을 더 제출해야만 된다. 최초의 선전과는 달리 결국 칼을 들어 스스로의 주장을 거부한다는 자칭 구세주들과 예수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차이는 다른 구세주들이, 자기는 보통 인간에 불과함을 알고 있음에 대하여 예수는, 자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신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인류의 구제자가 되고 싶어도 자기 사명을 수행하는 능력이 없다고 결론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이미 그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듯이, 단순한 인간에 불과하였던 자칭 구세주들을 저울에 올려놓고 보니 기대를 배신하는 자임을 알게 되었기에 이번에는 마지막 기대를 걸 수 있는, 신으로 출현한 구세주에게 눈을 돌려보기로 하자.
신으로 출현한 구세주
신으로 출현한 구세주를 차례차례 살펴보고,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주장하는 일을 행하는지를 음미하는 일은, 우리가 줄곧 지금까지 사용해 온 경험적 연구 방법 중 아직까지 없었던 불손한 방법을 적용하는 것으로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점은 실제로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판명될 것이다. 왜냐하면 계속 우리 앞에 나타나는 인물 중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신성의 주장이야 어떻든 간에 인간성의 주장이 상당히 의심스러울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체가 없는 그림자와 추상물, 즉 오직 존재가 '지각될' 뿐, 그 밖에 '실제'를 갖지 않은 버클리의 비실재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선조가 아테네의 솔론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확실한 실재자로 생각한 '스파르타 왕 리쿠르고스'에 대해 현대의 연구가 내린 선고와 똑같은 선고, 즉 그는 "인간이 아니라 신에 불과하다"는 선고를 내려야 하는 '인물' 사이를 순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여간 조사에 착수하기로 하자. 우선 최초로 가장 하위에 있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취급하여, 거의 인간 이하의 낮은 수준에서 차차 상승하여, '데우스 크루키 픽수스'(십자가에 박힌 신)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최고봉에 달하게 하자. 십자가 위에서 죽는 일이 인간이 그 신성을 주장하는 올바름을 증명하기 위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극치라면, 신으로서 인정되는 동시에 구제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무대 위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쯤 문제없을 것이다. 헬라스 문명의 쇠퇴가 일어난 세기의 아티카 연극의 무대에 나타난 '허수아비 신'은 이미 계몽 시대에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습에 묶여 극의 줄거리를 전통적인 그리스 신화 속에서 골라야 했으니, 난처한 극작가에게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하사물이었다. 극히 진행이 자연스러운 결말에 도달하기 전에 어떤 도덕적 이상, 또는 실제로 일어날 것 같지도 않은 사태에 빠져 꼼짝도 못 하게 되면, 작자는 하나의 극작법 관습 때문에 빠지게 된 그 함 정에서 또 하나의 다른 관습의 도움을 얻어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공중에 매달거나 차에 실은 '허수아비 신'을 무대 위에 등장시켜 결말을 지을 수 있었다. 옆에서 얼굴을 내미는 올림포스의 신들에 의해 제출되는 인간 문제의 해결법이 인간의 이지를 납득시키지 못하고, 또 인간의 감정에 어필하지 못하므로 이 아티카 극작가의 트릭은 학자들 사이에서 물의를 일으켜 왔다. 이 점에서 에우리피데스는 중죄인이었다. 현대 서유럽의 어느 학자가 말한 바에 의하면, 에우리피데스는 '허수아비 신'을 등장시킬 때마다 빈정대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한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본 합리주의자
베롤(9학자)에 의하면, 그가 일컫는 '합리주의자' 에우리피데스는 이 예부터의 관습을 잘 이용하여, 더 공공연하게 행하였다면 심한 꼴을 당하지 않고는 끝나지 않았을 사태를 염려하여, 풍자와 신을 모독하는 익살을 덮는 덮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덮개는 이상적인 천으로 되어 있어서 저속한 적들의 화살은 뚫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며, 더욱이 자기와 같은 회의주의자의 지각 있는 눈에는 속까지 환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무대에서는 신이 이야기하는 말은 모두가 신의 언어라는 그 사실 때문에 불신을 품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창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의가 있는 것이며, 거의 언 제나 허위이다. '에우리피데스는 신들을 무대에 나타냄으로써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믿게 했다' 인간의 경우, 위대함과 비참함에 좀 더 접근해 있으며 훨씬 더 예찬할 만한 것은 인간을 어머니로 하고, 초인간적인 존재를 아버지로 태어난 반신반인들(그리스의 헤라클레스, 아스클레피오스, 오르페우스 등)이다. 인간의 육체를 갖춘 이들 반신적인 존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애를 써서 어떡하든지 인간의 운명을 가볍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질투하는 신으로부터 벌을 받아 그들이 봉사하는, 죽어야 할 인간의 고뇌를 나누어 갖는다. 이 반신반인은(이 점이 반신반인의 자랑이지만) 인간과 마찬가지로 죽어야 할 운명에 있다. 그리고 이 죽어 가는 반신반인 모습의 배후에서 여러 다른 세계를 위해 갖가지 이름으로 죽은 참된 신들의 위대한 모습이 떠오른다. 미노스 세계를 위해서는 자그레우스, 수메르 세계를 위해서는 탐무즈, 히타이트 세계를 위해서는 아티스, 스칸디나비아 세계를 위해서는 발데르, 시리아 세계를 위해서는 아도니스, 시아 세계를 위해서는 후사인(시아파의 교장), 그리스도교 세계를 위해서는 그리스도로서 떠오른다.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모두가 같은 수난의 길을 걷는 신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세상의 무대 위에 십여 가지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신이 동일 신이라는 것은 늘 비극의 마지막 막에서 괴로움을 만나 죽어 감으로써 명백해진다. 그리고 인류학자가 제공하는 지식에 의지하여 늘 같은 형태로 반복되는 극의 역사적 기원을 알아낼 수 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죽어 가는 신'의 최고의 구현은 '에니아우토스 다이몬' (연신)의 역할이다. 봄에 인간을 위해 태어나 가을에 인간을 위해 죽어가는 식물의 정령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