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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에 따른 표준화

by 공부하는 샤샤 2026. 6. 25.

해체에 따른 표준화. 문명의 해체 과정을 알아보고 해체에 대한 표준화를 자세히 정리해보려고 한다.

해체에 따른 표준화
해체에 따른 표준화

문명 성장기의 특색,  다양성의 경향에 호응하는 문명

이제 우리는 문명의 해체 과정에 대한 조사의 종반에 도달하였거니와, 이 논제를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영역을 되돌아보았을 때 거기에 어떤 지배적인 경향(표준화와 획일성)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앞서 문명 성장기의 특색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 분화와 다양성의 경향에 호응하는 것과 정반대의 경향이다. 우리는 바로 조금 전에 피상적인 면에서 해체의 리듬이 똑같이 3박자 반이 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획일성의 징후는 해체기의 사회가 똑같은 세계급으로 명백히 분열하고, 또 이들 각 계급이 똑같은 창조 사업을 이루고 있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배적 소수자는 똑같이 철학을 만들어 내고 세계 국가를 낳으며, 내적 프롤레타리아는 똑같이 세계 교회로서 자기를 구현하기 위한 '고등 종교'를 발견하고, 외적 프롤레타리아는 똑같이 '영웅시대'에 활약하는 전투 단체를 결성한다. 이들 제도는 문명의 해체기에 반드시 똑같이 생겨나는 것을 확인하였다. 한층 주목할 만한 것은 영혼의 분열에 관한 연구에 의하여 밝혀지는 행동, 감정 및 생활양식의 획일성이다.

 

성장의 다양성과 해체의 획일성

이 성장의 다양성과 해체의 획일성과의 대조는 이를테면, 저 페넬로페의 길쌈 이야기와 같은 간단한 비유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예기되는 일이다. 남편 오디세우스가 없는 사이에 그의 정숙한 아내 페넬로페는 귀찮게 구애해 오는 남자들에게 늙은 시아버지 라에르테스의 수의(소)를 다 짜면 그들 중의 한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녀는 매일 낮 동안에는 열심히 짜지만, 밤이 되면 낮에 짠 것을 풀어 버린다. 매일 아침 날실을 걸어 씨실로 짜기 시작할 때 페넬로페는 어떤 무늬라도 무한한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데, 만약에 원하기만 한다면 매일 다른 무늬를 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밤일은 단조롭고 똑같았다. 짠 옷감을 풀 때는 무늬는 다르나 푸는 작업은 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낮의 동작이 아무리 복잡하였다 하더라도 밤일은 다만 실을 빼는 것뿐인 단순한 동작에 지나지 않았다. 이 피치 못할 단조로운 밤일을 되풀이해야 하는 페넬로페는 확실히 가련한 여성이었다. 만약에 이 단조롭고 지루한 일에 무슨 목적이 없었다면 그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역이었을 것이다. 페넬로페를 늘 격려한 것은 '나는 그분이 보고 싶다'는 그녀의 영혼의 노래였다. 그녀는 희망 속에 살면서 일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희망은 이루어져서 오디세우스는 돌아왔고 페넬로 페가 여전히 자기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오디세이아」는 두 사람의 재회로써 끝난다. 이와 같이 페넬로페의 실을 푸는 일조차 헛되이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의 연구 같은 큰 일에 더 훌륭한 직공이 되지 못할 까닭이 없다. 다음과 같이 괴테의 시에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어 있는 직공의 노래는 어떠할까?

 

삶의 격류 속, 행위의 폭풍우 속을

이리로 저리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나는 파도를 헤치며 나아간다.

탄생과 죽음,

영원한 바다의 밀물과 썰물.

가로세로 짜나가는

불타는 생명,

'시간'의 분주한 베틀을 움직인다.

하느님의 살아 있는 옷을 짠다.

 

'시간의 베틀' 위에서 실을 짜기도 하고 풀기도 하여 만들어 내는 '땅의 영혼'의 작품은, 인간 사회의 발생•성장•쇠퇴•해체가 되어 나타나는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역사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 삶의 격랑과 행위의 폭풍우 속에서 우리가 도전과 응전, 은퇴와 복귀, 패주와 회복, 어버이 문명과 자식문명, 분열과 재생 따위의 이름으로 부른 다양한 변화로 나타나는 하나의 기본적인 리듬의 박자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기본적인 리듬은 '음'과 '양'이 교체하는 리듬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으면, 비록 스트로페는 안티스트로페의 응답을 받고 승리는 패배의 창조는 파괴의 탄생은 죽음의 응답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 리듬이 벌이는 운동은 결코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싸움의 일진 일퇴도 아니고, 또 물레방아의 회전도 아님을 우리는 알았다. 바퀴가 끊임없이 회전할 때마다 그만큼 수레가 목적지에 접근한다면, 결코 헛된 되풀이가 아니다. 만약에 재생이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고 부활은 탄생이 아니라고 한다면, '생존의 수레'는 지옥으로 떨어진 이크시온에게 영속적으로 고문을 가하는 단순한 무서운 도구가 아니다. 이처럼 생각한다면, '음'과 '양'의 리듬을 치는 음악은 창조의 노래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착각이라고 잘못 생각할 염려는 없다. 귀를 기울이면, 창조의 선율이 파괴의 선율과 교체하는 것을 뚜렷이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중의 선율, 조화로운 소리

이중의 선율은 존재의 노래가 악마의 위작이 아니라 진품이라는 증거이다. 잘 들으면 2개의 선율이 부딪칠 때 불협화음이 아니라 조화로운 소리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창조가 자기 안에 자기와 반대의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흡수하여 소화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땅의 영혼'이 짜는 살아 있는 피륙은 어떠한가? 그것이 짜이면 즉시 하늘나라로 챙겨가는가, 아니면 이 지상에서도 그런대로 그 영묘한 옷감 조각을 엿볼 수 있는가? 직공이 짰던 피륙을 다 풀어놓은 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 문명의 해체에서 펼쳐지는 야외극이 비록 헛된 것 일지언정 반드시 뒤에 흔적을 남기고 가는 것임을 우리는 발견하였다. 문명이 소멸할 때는 언제나 반드시 세계 국가와 세계 교회와 야만족 전투 단체를 뒤에 잔유물로 남긴다. 이들 남은 잔유물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아무 쓸모없는 헛된 사물인가? 아니면 이들 잔유물을 집어 들고 보면, 직공이 이제까지 그것에 전념하고 있는 듯이 보인 요란한 베틀보다 더 영묘한 베틀이며, 마치 요술처럼 모르는 사이에 짜낸 새로운 걸작품들일까? 이런 새 물음을 염두에 두고 이제까지의 연구 결과를 돌이켜보면, 이들 연구 대상물이 단순한 사회 해체의 부산물, 그 이상이라고 믿어도 좋은 이유가 발견된다. 우리가 처음으로 이들 대상과 마주친 것은 '부자 관계'의 증거로 다루었다. 그런데 이 관계는 하나의 문명과 또 다른 문명 사이의 관계이다. 분명 이 세 가지 제도는 어느 단일 문명의 역사만으로는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이들 제도의 존재는 하나의 문명과 다른 문명과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독립된 존재로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 독립성은 어디까지 유지되는가? 우리는 이미 세계 국가를 다루었을 때 세계 국가가 가져오는 평화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지만, 그러나 일시적인 것임을 알았다. 야만족 전투 단체를 다루었을 때도 역시 우리는 죽은 문명의 시체 속에 들끓는 구더기와 같은 이들 전투 단체는 부패하는 시체가 분해되어 깨끗한 원소로 돌아가면, 이미 살아 있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비록 전투 단체가 아킬레스처럼 일찍 죽는 운명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야만족의 짧은 생애는 적어도 영웅시대를 기념하는 서사시 속에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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