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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환영, 세계 국가를 바라보는 눈

by 공부하는 샤샤 2026. 6. 26.

불멸의 환영, 세계 국가를 바라보는 눈. 세계 국가를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불멸의 환영, 세계 국가를 바라보는 눈
불멸의 환영, 세계 국가를 바라보는 눈

세계 국가를 밖에서 바라보는 눈

세계 국가를 밖에서 바라보는 방관자로서가 아니라 세계 국가에 속한 시민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들 시민은 단순히 그들의 지상적인 국가가 영구히 존속하는 것을 바랄 뿐만 아니라, 이 인간의 제도가 불멸성을 보증받고 있다고 실제로 믿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더구나 가끔 시간적 또는 공간적으로 다른 처지에 놓여 있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세계 국가에는 마침 그 시기에 단말마의 상태에 있음을 의심할 여지없이 나타내는 사건 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역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한 관찰자는 의당 의문을 품을 것이다. 세계 국가의 시민들은 왜 명백한 사실을 무시하고, 세계 국가를 황야 속의 하룻밤 은신처로는 보지 않고 '약속의 땅'으로 보고 인간이 노력하는 최종 목표로 간주하느냐고. 그러나 미리 말해 두어야 할 것은 이상과 같은 기분을 갖는 것은 토착의 제국건설자에 의하여 수립된 세계 국가의 시민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영국령 인도 제국의 불멸을 바라거나 예언한 인도인은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헬라스 문명의 세계 국가였던 로마 제국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는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의 성립을 목격한 당시 사람들이 분명히 마음속으로 그렇게 믿고 로마 제국과 제국을 수립한 '로마 시'가 함께 불멸의 생명을 부여받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음을 본다. 티불루스(재위 기원전 54~18)는 '영원한 도시의 성벽'에 대해서 노래 부르고 있고, 베르길리우스는 유피테르에게 아에네아스의 미래 자손인 로마 인에 대해 "나는 그들에게 제국을 준다"라고 말하게 하고 있다. 리비우스도 마찬가지로 확신을 갖고 '영원한 도시'라 쓰고 있다. 회의가인 호라티우스마저 그의 서사시의 불멸을 주장하면서, 로마 도시 국가의 연중행사로서 행해지는 '종교적 의식의 반복'을 자신의 영원성을 재는 구체척도로 삼고 있다. 그의 서사시는 아직도 사람들에게 읊어지고 있다. 앞으로 언제까지 그 '불멸성'이 계속될지 모른다. 그의 서사시를 인용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는 근래 교육 풍조의 변화에 따라 매우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시는 로마의 이교 의식보다 4배 내지 5배의 수명을 유지한 셈이 된다. 호라티우스나 베르길리우스의 시대에서 400년 이상 지난 뒤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에 의하여 이미 로마의 종언이 선고된 이후, 아직 우리는 갈리아 태생시인 루틸리우스 나마티아누스(3만의)가 여전히 의기양양하게 로마의 불멸성을 주장하고, 또 예루살렘에 틀어박혀 학구 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성예 로메스가 그 신학적 노력을 중지하고 루틸리우스와 거의 같은 말로 그 비탄과 경악을 표현하고 있음을 본다.

 

로마의 멸망, 세계 국가의 충격

이 이교도의 관리와 기독교의 교부는 오늘의 우리들 처지에서 보면 훨씬 전부터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던 사건에 대한 감정적 반응에서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기원 410년의 로마 멸망이, 일시적 세계 국가를 영원한 것으로 착각했던 시민들에게 준 것과 똑같은 충격을, 1258년에 바그다드가 몽골족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에 아랍 칼리프국의 사람들에게 준 충격과 맞먹는 사건이었다. 그 충격은 로마 세계에서 팔레스티나부터 갈리아까지 미쳤고, 아랍 세계에서는 파르가나에서 안달루시아까지 미쳤다. 심리적 효과의 강렬함은 칼리프국이 로마보다 더욱 심각했다. 왜냐하면 훌라구가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의 '마지막 숨통'을 끊었을 때는 아바스 왕조가 실권을 잃은 지 이미 3~4세기나 지난 뒤였으며, 그 광대한 영토의 대부분은 다만 명목상으로 복종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빈사 상태의 세계 국가가 머리 위에 드리운 이 환상적인 불멸성은 흔히 현명한 야만족의 수령들에게 지배 지역을 분배함에 있어 마찬가지로 환상적인 복종을 맹세케 한다.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믿는 동고트족의 아말릉 지도자들과 시아파에 속하는 다이람인의 부와이 지도자들은 표면상 각각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와 바그다드의 칼리프의 대관으로서 지배하기로 하여 자기들의 정복 명분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 두 전투 단체의 경우는 노쇠한 세계 국가를 이처럼 교묘하게 조종했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그들 특유의 이단적 종교를 고수함으로써 부득이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을 전환하기 위하여 정치적 책략상 필요했고, 동시에 현명 함과 행운을 가졌던 이웃 야만족이 실행하였을 때에는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테면 프랑크 왕국 클로비스는 로마 제국의 야만족 후계 국가 건설 자 중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는데, 가톨릭교로 개종에 이어 멀리 콘스탄티노 플을 수도로 삼은 황제 아나스타시우스로부터 집정관의 인세와 더불어 지방 총독의 칭호를 받았다. 그의 성공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 후 그가 정복한 땅에 그의 이름의 변화 형태인 '루이'를 호칭하는 왕이 18명 (루이 1세로부터 루이 18세에 이른다)이나 군림한 사실에 의하여 입증된다. 앞서 이 '연구' 앞부분에서 본 바와 같이, 비잔틴 문명의 세계 국가가 된 오스만 제국 역시 이미 '유럽의 병자'라 불리게 된 후에도 환상적인 불멸성이라는 특색을 나타냈다. 이 제국을 분할하여 각각 후계 국가를 세운 야심에 찬 무장들(이집트와 시리아에서는 메메트 알리, 알바니아와 그리스에서는 안니나 알리, 루멜리아 서북부 비딘의 파스바노글루)은 파디샤의 영토를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행한 모든 사사로운 행동을 파디샤의 이름으로 행하도록 각별히 마음을 썼던 것이다.

 

서유럽, 똑같은 술책을 사용

서유럽의 여러 나라가 그들의 뒤를 따라 똑같은 술책을 사용했다. 이를테면 영국은 1878년 이후 키프로스 섬을, 1882년 이후에는 이집트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1914년에 터키와 전투를 벌일 때까지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이름으로 지배하였다. 힌두 문명의 세계 국가인 무굴 제국도 같은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1707 년의 아우랑제브 황제가 사망한 후 반 세기 동안, 이전에 인도아 대륙의 대 부분에서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고 있던 이 무굴 제국은 차차 그 영토를 빼앗겨 약 6만여 평방킬로미터의 작은 나라가 되었으며, 또한 반세기 후에는 델리의 '붉은 요새' 성벽에 둘러싸인 구역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1707 년부터 150년이나 지난 후에도 여전히 악바르와 아우랑제브의 자손이 왕좌에 앉아 있었다. 만약에 이 가련한 로봇 황제로 하여금 그의 의사에 반하여 잠시 계속된 무정부 시대 후에 그가 여전히 상징하고 있던, 아주 옛날에 망한 무굴 제국에 대체된 외래 정권에 대한 반란을 지지하도록 1857년의 반 란자들 (성자의 부해외 리부) 이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그 황제는 더 오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세계 국가의 불멸성이 끈질기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한층 주목할 증거는, 세계 국가가 사멸되고 불멸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그 망령을 불러일으키는 관행이다. 이를테면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은 카이로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으로서 부활하고, 로마 제국은 서유럽의 신 성로마 제국 및 정교 기독교 세계의 동로마 제국으로 부활했다. 또 진•한 제국은 수•당 제국으로 부활했다. 로마 제국 창설자(카이사르)의 성은 '카이저(독일)' 및 '차르(러시아)의 칭호가 되어 부활하고, 본래 무하마드 (마호 메트)라는 후계자의 의미였던 '칼리프'의 칭호는 카이로에 모습을 나타낸 다음 이스탄불에 옮겨져 20세기에 서유럽화 정책을 취한 혁명가들(청년 터키 당)의 손으로 폐지되기까지 존속했다. 이상은 세계 국가 불멸성이 냉담한 현실에 의하여 명백히 부정된 후에도 아직 몇 세기 동안이나 계속 살아남았음을 나타내는 수많은 역사적 사례 중 에서 겨우 몇 가지를 골라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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