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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국가 시대의 전화 출현

by 공부하는 샤샤 2026. 6. 27.

세계 국가 시대의 전화 출현. 과연 세계 국가 시대의 전화 출현은 어느 시점에 어떻게, 어떤 영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세계 국가 시대의 전화 출현
세계 국가 시대의 전화 출현

세계 국가 시대의 전화 출현, 그  활용법

우리의 다음 과제는 세계 국가가 자기 뜻과는 관계없이 제공하는 봉사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내적과 외적 프롤레타리아와 다른 문화가 이러한 편익을 어떻게 이용하는 가에 관하여 경험과 사실에 기초를 두어 조사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일 먼저 예비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도대체 왜 이런 수동적•보수적•복고적인 제도, 실제 여러 가지 점에서 소극적인 제도가 누군가를 위하여 공헌할 수 있는가? 창조적 활동력의 불은 '동란 시대'의 폭풍에 정면으로 마주치면 바람에 날려 꺼지지만, 세계 국가의 보호아래 점화되면 약한 바람에는 꿈쩍도 않는 불꽃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물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공헌은 가치가 있긴 하지만 소극적인 것이다. 세계 국가 시대에 출현하는 사회 정세 속에서, 그 수혜자에게 주는 최대의 은혜인 새로운 창조력의 적극적인 원천이 되는 것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하나의 실마리는 복고주의가 '사태를 수습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마침내 자기 처지를 포기하고 새것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 속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산산이 파괴된 사회에서 살아남은 조직을 세계 국가의 정치적 틀 속에 넣어봤자 이미 사멸된 것을 부활시키는 데 이바지하지 못하며, 또 남은 것이 차차 붕괴해 가는 것을 막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끊임없이 확대해 가는 커다란 사회적 공백의 위협이 세계 정부로 하여금 부득이 그 본래의 경향에 반하는 행동을 취하게 한다. 더욱더 확대해 가는 틈 속에 공백을 메꾸려는 이러한 노력의 전형적인 예는 로마제국 성립 후 2 세기 동안의 정치사가 보여 준다. 로마 정치의 비결은 '간접 통치 원칙'이었다. 헬라스 사회의 세계 국가를 건설한 로마 인은 아직 헬레니즘 문화가 정치적인 뿌리를 박고 있지 않은 외 곽 지역에 독립된 후국을 가진 자치적인 도시 국가 연합체로 된 세계국가를 만들 계획이었다. 따라서 행정 책임은 이들 지역 당국에 위임되었다. 이 정책이 의식적으로 고쳐진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평화'가 2세기 동안 계속된 뒤의 로마 제국을 보면, 행정 조직은 사실상 변형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종속 후국은 속주가 되어 버렸고, 속주 자체는 중앙 정부의 직할 기관이 되었다. 지방 행정 수행에 필요한 인적 자원은 점점 고갈되고, 점점 증대하는 지방 행정을 담당할 인재의 결핍에 직면한 중앙 정부는 종속 후국의 군주를 폐하고 황제의 임명을 받은 총독으로 바꾸고 도시 국가 행정도 임명을 받은 '관리자'의 손에 맡겨야 했고, 최후에는 제국 행정 전체가 계층적으로 조직된 관리의 손에 넘어갔다. 이러한 변화를 강요당한 지방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강요한 중앙 정부 쪽도 별로 자진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양쪽 다 불가항력의 희생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제도들은 대단히 큰 '전파성'을 갖고 있었으므로 결과는 혁명적이었다.

 

혼효 의식과 통일 의식의 주용한 특색

우리는 앞서 혼효 의식과 통일 의식이 사회적 해체기의 두 가지 주요한 특색임을 알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심리적 경향은 주관적 견지에서 보면 아주 상반되는 것인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는 서로 힘을 합쳐 동일한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런 시대의 풍조가 세계 국가에 의해 수립한 이들 새로운 임시변통의 제도에 주는 것은, 해양이나 대초원 지대가 주는 인간의 심리적 분위기가 아니라, 그 자연적 성질에 바탕을 두고 갖고 있는 파생성에 비길 만한 '전파성'이다. "대지의 표면이 전 인류를 지탱하고 있듯이, 로마는 지상의 모든 민족을 그 품 안에 받아들인다. 마치 하천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것과 같다." 우리 가 앞서 인용한 아엘리오스 아리스테이데스는 이렇게 쓰고 있는데, 그와 같은 비유를 토인비도 아리스테이데스의 저작을 알기 이전에 쓴 어느 글 속에서 사용한 일이 있다. "로마 제국에 관한 개인적 감상을 비유에 의하여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은 그 연안에 로마 제국의 도시 국가군이 그물눈처럼 분포하고 있었던 지중해를 닮고 있었다. 지중해는 어찌 보면 지중해에 물을 흘러 보내어 그것을 만들어낸 하천의 보잘것없는 대용물로 보인다. 흐리든 맑든 강은 살아 있는 흐름이었다. 지중해는 짤뿐만 아니라 움직이지 않고 죽은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잘 조사해 보면 거기에도 역시 움직임과 생명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중해의 한 부분에서도 다른 부분에서도 끊임없이 소리 없는 해류가 순환하며 흐르고 있고, 증발하여 없어져 가는 듯이 보이는 표면의 물도 사실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짠맛이 빠진 채 생명을 부여하는 비가 되어 다른 장소, 다른 계절에 내린다. 그리고 해면의 물이 구름 속에 흡수되어 감에 따라 끊임없이 바닥에서 올라오는 하층의 물이 그 뒤를 메운다. 지중해 자체가 끊임없이 창조적인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 거대한 지중해의 영 향은 그 연안의 훨씬 저쪽에까지 미친다. 우리는 지중해가 멀리 떨어진 대륙의 심장부에서, 이 바다 이름을 여태껏 들은 일도 본 일도 없는 민족 사이에서 그것이 극한적인 기온을 완화하고 사물에 생기를 주고 동물과 인간의 생활을 번영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국가의 전파 역할을 하는 사회적 운동에는 사실 수평적이면서 수직적 운동이다. 수평적 운동의 예로서는 대플리니우스가 그 저서 「박물지」 속에서 증언하고 있는 로마 제국의 약초 보급과 아랍 칼리프국 동쪽 끝에서 서쪽 끝에 미친 종이 사용의 보급을 들 수 있다. 종이의 사용은 751년 중국에서 사마르칸트에 전해지고, 793년에는 바그다드, 900년에는 카 이로, 1100년 경에는 거의 대서양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페스, 1150년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하티바 등으로 퍼져갔다. 수직적 운동은 포착하기 힘들 때도 있으나 종종 한층 중요한 사회적 영향을 미친다.

 

동아시아 문명사회의 사회적 변화 과정

동아시아 문명사회의 세계 국가였던 일본의 경우 도쿠가와막부의 역사 가운데 그 예가 보인다. 도쿠가와막부는 일본을 세계의 다른 나라들로부터 고립시키는 일에 전념한 나머지 그럭저럭 200년 동안 이 정치적 '곡예'를 지속하는 일에 성공했지만, 이전의 동란 시대로부터 이어받은 봉건 제도를 고정시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일본 제국 내부에 서의 사회적 변화 과정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화폐 경제가 일본에 침투함으로써 완만하나 불가항력적인 혁명이 야기되어 마침내는 봉건 정치가 와해되고 200년 이상에 걸친 쇄국 뒤에 외국과의 교제가 재개되기에 이르렀다. 문호를 연 것은 외부의 강압이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폭발이었다. 새로운 경제적 힘의 첫 결실의 하나는 무사와 농민의 희생으로 획득된 '평민의 부'가 증대되었다. 영주와 그 가신들은 장인이 만들고 상인이 파는 사치품에 돈을 낭비하고, 그 때문에 1700년경에는 그들의 금과 은이 거의 전부 평민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외상으로 상품을 사게 되었다. 곧이어 그들은 상인 계급에 대해 막대한 빚을 지고 그들이 거둬들인 쌀을 저당 잡히든가 부득이 팔아치워야 했다. 기강이 문란해지고 재액이 잇달아 일어났다. 상인은 쌀 투기를 일삼고, 이윽고는 무기 거래에 손을 댔다. 이 같은 정세에 서 이익을 거둔 것은 어느 한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뿐이었으며 그들 전부는 아니었다. 그것은 상인, 특히 중개업자와 대금업자였는데, 원칙적으로 말하면 무사에 대해서 조금만 실례된 말투를 쓰기만 해도 그 자리에서 칼에 맞아 죽고 멸시받던 평민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사회적 지위는 낮았지만, 돈지갑을 쥐고 있었기에 차차 세력을 증대해 갔다. 1700년경에는 이미 그들은 국가에서 가장 유력하고 진취적인 요소의 하나가 되고 무사계급은 서서히 세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히데요시(중금)가 그의 독재제에 대한 최후의 저항을 극복한 1590년을 일본의 세계 국가 성립의 연대로 보면, 하층의 물이 바닥에서 표면으로 올라와 히데요시의 후계자들이 플라톤의 유토피아와 거의 같은 부동 상태로 동결시키려고 애쓰며 사회에 무혈 혁명을 일으키는데 겨우 1세기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결과는 도쿠가와막부에 의한 세계 국가가 문화적으로 극히 고도의 등질적인 것이었던 만큼 한층 결과는 인상적이다. 세계 국가의 '전파성'에 대한 예증은 우리가 충분한 역사적 지식을 갖고 있는 한 다른 어떤 경우에서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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