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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국가 평화의 심리학

by 공부하는 샤샤 2026. 6. 30.

세계 국가 평화의 심리학.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는 세계 국가의 평화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세계 국가 평화의 심리학
세계 국가 평화의 심리학

세계 국가의 심리학적 제도

세계 국가가 그 건설자에 의하여 강요되고 그 주민에 의하여 받아들여지는 것은 동란 시대의 병을 고치는 만능약으로서 이다. 심리적학으로 말하면 그것은 융화를 확립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이다. 그리고 이것은 올바르게 진단된 병에 대한 올바른 요법이다. 병은 일가의 집안싸움이며, 갈라진 틈은 세로와 가로의 두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서로 싸우는 사회 계급 상호 간에는 가로의 균열이 있고 서로 싸우는 국가 상호 간에는 세로의 균열이 있다. 앞 시대의 지방 국가 간의 전쟁에서 오직 살아남은 하나의 세력을 바탕으로 하여 세계 국가를 만드는데 이어 제국 건설자가 지향하는 최고의 목표는 그들이 정복한 지방 국가의 지배적 소수와의 융화를 도모하는 일이다. 그러나 비폭력이라는 것은 사회생활의 한 부분에만 국한할 수가 없는 심리 상태이며 행동 원리이다. 지배적 소수자가 상호 간에 구하는 융화 관계는 지배적 소수자와 내적•외적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인간화되어 가는 문명과 접촉하는 이질 문명과의 관계에까지 넓혀져야 한다. 이 전반적인 융화가 초래하는 이익은 수혜자 여하에 따라 정도를 달리한다. 지배적 소수자는 그것에 의하여 어느 정도 세력을 다시 만회할 수가 있지만, 그보다 프롤레타리아 쪽이 더 많이 세력을 증대시킨다. 왜냐하면 이미 생명은 지배적 소수자에게서 떠나 있고, 바이런이 조지 3세의 유해에 대해 내린 불경한 말을 흉내 내어 말하면, "아무리 향료를 넣어 보았자 그저 부패를 연장시킬 뿐"이다. 같은 향료라도 프롤레타리아에게는 힘을 배양하는 비료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 국가에 의하여 확립되는 휴전 기간 중에 프롤레타리아의 힘은 중대하지만, 지배적 소수자의 힘은 감퇴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국가의 건설자가 그들 자신 사이의 싸움을 없앤다는 소극적인 목적을 위해 실행하는 관용 정책은 내적 프롤레타리아에게 세계 교회를 세우는 기회를 주고, 다른 한편 세계 국가 주민 사이에서의 전투 정신 감퇴가 외적 프롤레타리아의 야만족이나 인접하는 이질문명이 밖으로부터 침입해 와서, 종교에서는 활동적이지만 정치에서는 완전히 수동적으로 되어버리는 내적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잡는 기회를 준다. 지배적 소수자가 그들 자신이 만들어 낸 상태에서 이익을 얻는 일이 비교적 적다는 것은 그들의 철학 또는 '공상 종교'를 위에서 아래로 퍼뜨리려 함으로써 거의 언제나 실패한다는 사실로 나타난다.

 

유효하게 세계 국가의 평화적 분위기를 이용하는 프롤레타리아

이에 반하여 내적 프롤레타리아가 얼마나 유효하게 세계 국가의 평화적 분위기를 이용하여, 아래에서 위로 고등 종교를 전파시키고 마침내 세계 교회를 세우게 되는 일이 많은가 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를테면 이집트 문명 최초의 세계 국가인 이집트 '중기 제국'은 오시리스 교회에 의하여 이러한 목적에 이용되었다. 바빌로니아 문명의 세계 국가인 신바빌로니아제국 및 잇달아 그 뒤를 이어받은 외래 후계 국가인 아케메네스 왕조 제국과 셀레우코스 왕국도 유대교와 그 자매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에 의하여 역시 같은 모양으로 이용되었다. '로마의 평화'가 제공한 기회는 몇 개의 서로 경쟁하는 프롤레타리아 종교, 즉 키벨레 숭배와 이시스 숭배나 미트라교와 그리스도교가 이용되었다. 중국 문명 세계인 '한나라의 평화'가 제공한 같은 모양의 기회도, 인도 사회의 프롤레타리아의 종교인 대승 불교와 토착 중국 사회의 프롤레타리아 종교인 도교가 서로 다투어 이용했다. 아랍 칼리프국들은 이슬람교를 위하여, 또 인도 문명 세계인 굽타 제국은 힌두교를 위하여 같은 모양의 기회를 제공했다. 몽골 제국은 한때 태평양 서안에서 발트해 동안에 이르고, 시베리아의 툰드라 지대의 남쪽 가 아라비아 사막 및 미얀마의 정글 지대 북쪽 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효과적인 '유목민의 평화'를 널리 퍼뜨렸는데, 이 제국이 제공하는 기회에 의하여 수많은 경쟁 종교 포교자들이 끌어들여졌다. 이 몽골 제국이 존속한 기간이 극히 짧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나 서방 가톨릭교, 이슬람교, 또 대승 불교의 일파인 라마 탄트라 교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처럼 자주 세계 국가의 사회적•심리적 풍조에 의하여 이익을 거둔 고등종교의 대표자들은 이따금 그 은혜를 자각하고, 그것을 그들이 각 명칭과 그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유일한 참된 신'의 덕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이사야' 및 '에스라' , '느헤미야' 필자의 눈으로 보면, 아케메네 스 제국은 야훼가 선택한 유대교 포교의 수단이었고, 레오 대교황 (재위 440~461년)도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을 신의 섭리에 의하여 그리스도교의 보급을 쉽게 하기 위해 세워지게 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제82 설교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형언하기 어려운 은총의 효과를 널리 세계에 펴기 위해 신의 섭리로써 미리 로마 제국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이 생각은 그리스도교 사상에 있어 하나의 통념이 되었다. 이를테면 밀턴의 '그리스도 강림의 아침'의 노래 속에도 모습을 나타낸다. 싸움이나 전쟁의 소리는 온 세계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다. 쓸모 없어진 창과 방패는 높직이 걸리고 자물쇠가 채워진 전차는 적의 피로 물들지 않은 채 정지해 있고 나팔은 무장한 군단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왕들은 외경에 찬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다. 그들의 주(호)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는 듯이. 이처럼 멋진 기회가 신으로부터의 선물로 생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포교에 성공하는 교회와, 그 교회가 활동하는 세계 국가와의 관계에 서 교회로 하여금 순조로운 출발을 시키는 관용의 풍조는 항상 끝까지 지속한다고만 할 수는 없으며 때로는 그 반대의 것으로 바뀐다. 물론 그러한 불행한 결과가 생기지 않은 경우도 몇 가지 있다. 오시리스 교회는 한 번도 박해를 받지 않고 마지막에는 이집트 사회의 지배적 소수자의 종교와 융합했다. 마찬가지로 중국 문명에서 세계 국가인 대승 불교와 도교와 한제국 사이에는 기원 평화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유대교와 조로아스터교의 경우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이나 아케메네스 제국과의 관계가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없다. 이 두 세계 국가는 그 역사의 초기에 생명이 끊겼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아케메네스 정권이 갑자기 셀레우코스 정권으로 대체되고, 결국 끝에 가서는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땅에서 로마의 권력과 대체됨과 동시에 외래 헬라스 문화의 충격은 유대교와 조로아스터교 모두를 전인류에게 구제의 복음을 선전하는 본래의 사명으로부터 일탈시키고, 헬라스 사회의 침략에 대한 시리아 사회의 반항에, 이들 두 종교를 문화 투쟁의 무기로 전환시켰다는 사실뿐이다. 가령 아케메네스 제국이 헬라스 문명에 의해 멸망한 뒤 재현한 아랍 칼리프국과 마찬가지로 천수를 다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조로아스터교나 유대교의 어느 쪽인가가 너그러운 아케메네스 제국 정부의 보호 아래, 이미 이슬람교에 앞서서 이슬람교와 같은 위업을 이룩했을 것으로 상상된다.

 

옴미아드 왕조가 지킨 이슬람교도

이슬람교는 옴미아드 왕조의 무관심과 아바스 왕조가 양심적으로 지킨 이슬람교도가 아닌 '코란 민족'에 대한 관용정책 덕으로, 오히려 방해가 되는 정치권력의 원조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일 없이 서서히 세력을 뻗치어 마침내 아바스 왕조의 붕괴와 더불어 목전에 닥친 정치적 공백기의 폭풍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아 이슬람교 사원의 경내에 쇄도하는 다수의 자발적 개종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인도 사회 최초의 세계 국가 마우리아 제국이 재현된 굽타 제국 시대에 불교 철학이 불교 이후의 고등 종교인 힌두교에 의하여 밀려났으나, 이런 움직임은 마우리아 왕조의 반대에 부닥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치의 박해로 방해되는 일도 없었다. 도대체 박해라고 하는 것은 인도 문명의 너그럽고도 혼합적인 종교적 기질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등 종교가 세계 국가로부터 평화의 은혜를 입고 정부 당국자로부터 시종 관용의 태도로 대해진 경우와는 반대로, 정부의 박해로 고등 종교의 평화적 발전이 방해되고 봉오리가 꺾이는가 하면 본래의 성질을 잃고 정치 활동과 무력 항쟁에 동원된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서양 가톨릭 그리스도교가 일본에서는 17세기에, 중국에서는 18세기에 거의 완전히 근절되는 경우를 당했다. 중국 원나라 시대의 이슬람교는 겨우 2개의 지역에 발판을 얻었을 뿐, 항상 이질적인 소수자의 지위에 머물며 그 불안정한 지위 때문에 가끔 폭동으로 달리게 되었다. 로마 제국 정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승리의 전주곡이 된 로마의 박해가 그리스도교에 미친 악영향은 비교적 가벼운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하기까지의 3세기 동안 그리스도 교회는 항상 로마의 정책과 충돌하는 위험에 마주 서 있었다. 왜냐하면 제정 시대의 로마 당국자가 언제나 품고 있던 온갖 종류의 사적 결사에 대해 적의를 품기보다는, 더욱 오래되고 더욱 피에 새겨져 있는 외래 종교의 예배 의식과 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사적 결사에 대해 특히 적의를 품는 로마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마 정부는 2개의 주목할 사례에서 이 엄격한 전통을 완화하였지만 기원전 2세기에 있었던 바커스 신도의 탄압은 기원 후 3세기에 그리스도 교도가 입게 될 운명을 미리 보여주는 전조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회는 정부의 박해에 반항하기 위해 정치적•군사적 결사로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 교회가 되어 미래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가 이 시련에서 전혀 상처를 입지 않고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비폭력이 로마의 힘에 이겼다는 교훈을 마음에 새기는 대신에 그리스도 교회는 그리스도교 박해자의 실패의 원인이 된 그 원죄에 스스로 빠짐으로써 패배한 박해자에게 정당성을 입증하고 그들에게 사후의 정신적 복수를 할 기회를 제공했다. 교회 자체가 그 후 얼마 안 가서 박해자가 되어 오랜동안 박해를 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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