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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본질에 대한 감정과 이성의 갈등

by 공부하는 샤샤 2026. 7. 17.

종교의 본질에 대한 감정과 이성의 갈등. 전 세계적으로 종교의 방향이 전진할 수 있었던 이유와 종교 본질에 대한 감정, 그리고 갈등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종교의 본질에 대한 감정과 이성의 갈등
종교의 본질에 대한 감정과 이성의 갈등

종교의 본질, 우연적 성질에서의 분리

신을 찾는 영혼은 어떻게 하면 종교의 본질을 그 우연적 성질에서 분리할 수 있는가? 전 세계적인 범위로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교도•불교도•이슬람교도•힌두교도는 통일의 방향을 향해 일보 전진할 수 있을까? 서로서로 정신적 광명을 추구하는 이들 구도자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선배가 이미 걸어왔고 또 그리스도 탄생 이래 기원 20세기의 고등종교에 의해 대표되는 종교적 계몽 단계에 있는 바로 이 험한 길이다. 원시사회의 이교적 신앙에 의해 대표되는 단계에 비하면, 이들 4개 종교의 상대적 계몽은 분명히 놀라운 진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선배의 노고 위에 편히 앉아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은 미해결인 채로 버려둘 수 없는 감정과 이성의 갈등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이 갈등은 정 신적으로 더욱 전진함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갈등이 어떻게 하여 발생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늘날의 감정과 이성의 갈등은 그 근본 원인이 분명하다. 그것은 근대 서유럽 과학이 고등 종교에게 준 충격으로 촉진된 것으로서, 근대 과학이 고등 종교를 앞지르기 시작한 시기는, 고등 종교가 아직 근대 과학적인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차피 지금쯤 은 시대에 뒤진 고물이 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많은 낡은 전통을 종교가 그대로 지니고 있던 단계에서였다. 그러나 이상은 종교와 합리주의가 부닥친 사상 최초는 아니다. 적어도 2개의 전례가 기록에 남아 있다. 2개 중 비교적 연대가 새로운 쪽을 먼저 생각해 내면, 우리는 현존하는 4개의 고등 종교가 각각 그 역사의 초기에는 한 시대 전 형태의 합리주의와 만났으며, 그 모두가 합리주의와의 타협에 성공했음을 상기할 수 있다. 이들 종교 하나하나의 현재 정통으로 간주되고 있는 신학은 기성의 세속적 철학과 타협한 산물이며, 이미 그 사상의 유파가 당시 그 교회의 천도 활동의 부대가 되어 있던 사회의 교양 있는 소수자 사이에 지배적인 사조가 되어 있었으므로 신종의 고등 종교는 그것을 무시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학과 이슬람 신학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헬라스 철학의 용어를 빌려 말한 것이며, 힌두 신학은 힌두교를 인도 철학의 용어를 빌려 말한 것이다. 또한 인도 천학의 한 유파인 대승 불교는 철학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종교로 전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이 이 이야기의 첫째 잠은 아니다. 신흥의 고등 종교가 철학을 고려해야만 했던 시대에 이미 고정된 사상 체계가 되어 있던 철학은 이전에는 동적인 사상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생기에 넘치고 활발하게 성장해 가는 청년기의 그리스 철학과 인도 철학은 헬라스 문명과 인도 문명이 원시인으로부터 이어받은 이교적 종교와 만났던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선례는 얼핏 보아 우리를 마음 든든하게 해주는 것처럼 생각된다. 만약에 인류가 과거에 종교와 합리주의의 조우를 두 번(즉, 헬라스시대의 철학과의 타협과 근대의 과학 문명과의 타협) 무사히 타개한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현재의 조우 결과를 예고하는 좋은 전조가 아니겠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전에 일어난 두 번의 조우 중 처음의 경우에는 현재와 같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고, 나중의 경우에도 문제는 그 시대, 그 장소의 목적에 적합하게끔 잘 해결되기는 하였으나, 그 일이 오히려 오늘날 20세기의 서유럽 화하는 세계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점이라는 사실이다.

 

철학과 전통적인 이교의 만남

이행기의 철학과 전통적인 이교가 만났을 때에는 감정과 이성을 화해시킨다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양자가 갈등할 공통의 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시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신념이 아니라 행동인 것이며, 그 종교를 신봉하고 있느냐 않느냐는 것은 신조에 동의하느냐 않느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사 행사에 참가하느나 않으냐에 따라 판별된다. 원시 종교의 행사는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며, 행사를 행하는 인간에게는 그들이 행하는 종교적 의식의 저쪽에 그러한 의식에 의해 전해지는 진리를 탐구하는 따위의 생각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의식은 그것을 틀림없이 실행하면 생긴다고 믿어지고 있는 실제적 효과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원시 종교가 행해지고 있는 곳에 '진실'과 '거짓'으로 표현되는 지적 용어로 인간 환경을 분석하는 철학자가 출현하여도 철학자가 계속하여 전통적인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한 갈등은 일어나지 않는다. 더구나 그의 천학 중에는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통적 의식 가운데는 철학과 양립하지 않는 요소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과 원시 종교는 마주치기는 했으나 갈등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 통칙의 예처럼 눈에 띄는 사건이 하나 있기는 하나 잘 조사해 보면 사정이 다르다. 소크라테스는 이교의 박해를 받아 사형에 처해진 철학의 순교자는 아니었다. 그의 처형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 뒤에 일어난 당파 간의 맹렬한 정치적 분쟁의 여파를 받은 사건이었다. 만약에 아테네의 '파시 스트당' 지도자('30인 참주'의 한 사람인 크리티아스)가 그의 제자 무리 가운데 끼어 있지 않았더라면, 소크라테스는 아마도 중국 문명의 이교적 세계에서 그와 동등의 지위를 차지한 공자처럼 침대 위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고등 종교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사태가 출현했다. 과연 고등 종교는 이들 새로운 신앙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회에서 행해지던 갖가지 전통적 제례 의식을 일소하고 그 대부분을 채택하였다. 물론 원시 종교의 잔영은 고등 종교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고등 종교가 원시 종교와 구별하는 새로운 특색은, 예언자가 직접 신으로부터 받았다고 믿어지는 계시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들 예언자의 말은 철학자의 명제와 마찬 가지로 '진리'나 '거짓이냐 하는 사실의 전술로서 제시되었다. 그와 동시에 '진리'의 정신적 영역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예언자의 계시와 철학자의 이성이라는 2개의 독립적인 권위가 나란히 서서 모두 지성의 활동 영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성과 계시는 이전에 이성과 의식(BLC)이 사이좋게 공존한 것처럼 서로 상대의 영역을 하지 않고는 공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진리'는 각각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타당성을 주장하여 서로 반복하는 2개의 형태로 분열한 듯한 광경을 나타내었다. 이 새롭고 난처한 사대에서 그것을 타개하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서로 다투고 뻥립하는 두 가지 형태의 진리의 대표자가 타협하든가, 아니면 철저하게 싸워서 한쪽이 다른 쪽을 쫓아 내든가, 어느 한쪽 길만을 택해야 했다. 그리스 철학•인도 철학과 그리스도쿄•이슬람교•불교•힌두교의 계시가 서로 만났을 때에는 양쪽이 온화하게 타협하여, 철학은 예언자의 가르침을 소피스트의 말로 바꿔 말할 수 있게 허락을 받은 대신 계시의 내용에 대해 천학 쪽에서 합리주의적 비판을 가하는 것은 중지하는 데 동의하였다.

 

신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이 타협 이 양쪽의 선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으나, 그것이 과학적 진리와 예언적 진리의 관계라는 문제에 진정한 해결을 제시하고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 신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의한 두 종류의 진리의 표면적인 화해는 다만 말뿐인 것으로, 신앙 조항으로서 성별된 표현은 두 진리의 두 가지 의미를 처음 그대로 애매한 상태에 두고 있으므로 영속적인 것일 수가 없었다. 이 두 번째 갈등의 거짓 해결이 몇 세대를 두고 현재까지 계승되어 와서 오늘날의 서유럽화해 가고 있는 세계에서의 종교와 합리주의의 사이에서 충돌의 해결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 철학자나 과 학자가 쓰는 경우와 예언자가 똑같이 쓰는 경우의 '진리'라는 말이 같은 사 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2개의 다른 종류의 경험을 나타내는 동음이의어라는 사실이 인식되지 않는 한 참된 해결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타협의 결과로써 조만간 다시 한번 갈등이 일어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계시의 진리가 과학의 진리를 나타내는 말로써 표현되게 된 이상 과학자는 언제까지나 과학적으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교리 체계에 비판을 가하는 일을 삼가고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한편 그리스도교 편에서도 그 교리가 합리적인 말로 표현되게 된 이상 본래가 이성의 관할에 속하는 지식의 여러 영역에 대해서 권위의 행사를 자제할 수 없게 되었다. 17세기에 근대 서유럽 과학이 헬라스 철학의 주문을 뿌리치고 새로운 지적 경지를 개척하기 시작했을 때, 로마 교회가 맨 처음에 행한 일은 오래전부터 교회의 오래된 맹우인 헬라스의 학문에 눈뜨기 시작한 서유럽의 지성이 가한 공격에 대해 금령을 내리는 일이었다. 마치 천문학의 '지구 중심설'을 그 리스도교의 신앙의 한 조항으로 보고, 갈릴레이의 프롤레마이오스 학설 수정을 신학적 오류인 것처럼 보는 듯한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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